일곱 번째 대전산내학살사건 희생자 위령제 행사 안내
<위령제 행사 개요>
- 주 제 : 제56주기 7차 대전산내학살사건 희생자 위령제
- 부 제 :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제56주기 7차 대전산내학살 희생자 위령제
- 일 시 : 2006. 7. 8일(토) 오전 10시~12시
- 장 소 : 대전산내초등학교, 대전시 동구 낭월동(골령골 학살현장) 일원
- 주 최 : 대전산내학살 대책회의 희생자 위령제 준비위원회
- 주 관 : 제주도4.3사건 희생자유족회 대전특별위원회
대전유족회/여수․순천 유족회/대전산내학살 대책회의
대전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미군 학살만행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대전충남본부
- 후 원 :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과거사 청산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
- 참여인원 : 약 500명
<참고2> / 대전산내학살 대책회의 주요경과보고
<1950년>
6월 27일 / 이승만 대통령 및 정부 대전으로 피난
7월 1일 / 이대통령 부산 피난
대전형무소 수감자 탈옥시도
미국 24사단 대전도착
7월 2~10일 / 대전형무소 수감 좌익인사 맟 군 예치수 처형된 것으로 추정.
7월 8일 / 전국 비상계엄령 선포(대전에서)
7월 11~14일 / 보도연맹자 등 좌익계 인사 골령골서 계속 처형(인원 모름)된 것으로 추정.
7월 13일 / 작전지휘권 미국으로 이양
7월 14일 / 대전형무소 폐쇄, 형무소 특경대원 철수.
7월 20일 / 북한군 대전장악
9월 28일 전후/ 유엔군 서울 수복, 대전 형무소 우익1천3백여명 집단처형.
<1992년>
2월 / 월간 ‘말’ 통해 최초보도
<1995년>
4월 / 민주주의민족통일대전충남연합내 자체 진상조사 착수
<1999년>
10월 / 대전참여자치연대내 ‘산내학살 진상조사반’ 구성, 자체 조사 착수
12월 / 제주 이도영 박사 통해 미국에서 해제된 비밀문서 발견
대전형무소 1800명 집단처형 보고서 및 학살 현장 사진 발견
<2000년>
1월 / 한국일보 후속보도 후 전국 여론화
12일 / 산내학살진상조사단 1차 회의
진상조사반 현장증언 활동
2월 / 진상조사반 증언채록 내용 ‘월간 말’ 2차 후속보도
제주, 여수,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3단체 공동 피해 신고센터 개설
대전 30여견 피해사례 접수
제주에서 4.3관련자 300명 50년 당시 대전형무소 복역 자료 발견
여수에서 여순사건 관련자 16명 50년 당시 대전형무소 복역 증언통해 확인
산내학살 현장부근 희생자 유골 다량 매장돼 있음을 확인
3월 / 대전전교도소, 도경찰청, 청와대, 국방부, 경찰청, 대전시 등 행정정보공개 신청
3월 3일 / 산내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전국회의(대전)
4일 /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질의에 대한 대전광역시 회신
6일 /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질의에 대한 대전교도소 회신
12일 / 산내학살진상조사단 2차회의
4월 10일 /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질의에 대한 법무부 회신
19일 / 유가족모임 추진을 위한 준비모임
25일 / 대전형무소 학살사건 질의에 대한 육군 회신
27일 / 진상조사단 준비모임
5월 2일 / 대전형무소 산내학살진상규명위원회 결성회의
16일 / 산내학살 대책모임 집행위원회
17일 / 2차 유족모임
산내 현장방문, 4.3유가족간담회 개최
19일 / 국제인권학술심포지움참석
26일 / 전국유가족모임 결성준비회의
6월 1일 / 대전산내 학살 사건 관련 기자회견 및 유족모임
9일 / 한국전쟁 양민학살 전국 유족 모임
21일 / 전국 양민학살 관련 심포지움 참석(서울)
24일 / 전국 양민학살 대책위원회 발족식
28일 / 대전산내 유가족 캠프준비모임
7월 8일 / 1차 산내학살진상규명위원회 위령제(대전골령골, 300명 참석)
28일 / 대전형무소 산내학살 진상규명위원회 집행위원회
11월 25일 / 민간인학살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 개최
12월 8일 / 대전산내학살대책회의 유족모임
<2001년>
2월 8일 / 대전산내학살대책회의 유족모임
3월 8일 / 산내학살 현장 안내 입간판 설치
3월 10일 / 한국전쟁전후 국제전범 조사단 방한 및 산내학살 현장방문
4월 6일 / 이도형 박사 초청 강연회 개최
5월 12일 / 코리아전범재판 성사를 위한 산내학살지 순례
5월 23일 / 민간인학살 특별법 국회공청회 참석(국회)
6월 29일 / 산내학살진상규명위원회 위령제 준비모임
7월 8일 / 2차 산내학살진상규명위원회 위령제(대전골령골, 400명 참석)
9월 6일 / 민간인 학살 전국유족회 건설모임(서울)
9월 12일 / 대전산내학살 관련 통합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회의원 협조요청문 발송
9월 21일 / 민간인 학살 전국유족회 건설모임(대전)
대전산내학살 관련 통합특별법 제정 국회청원(김원웅 외 47명 국회의원 발의)
10월 22일 / 전국유족회 재창립 및 유족대표자회의(서울)
11월 5일 / 전국유족회 재창립 및 전국위령제 참석
23일 / 동구청 불법 건축물 허가에 대한 긴급대책모임 개최
<2002년>
1월 3일 / 산내학살 건축허가 규탄 동구청앞 1인 시위
6일 / 제주유족회 학살현장 건축공사 중단 청원
8일 / 학살지 현장 교회신축에 대한 탄원서 제출
정기총회 개최하여 조직명칭을 ‘대전산내학살대책회의’로 변경
9일 / 산내학살지 현장 및 구대전형무소 방문
22일 / 대전산내학살지 건축관련 대전 KBS충청패트롤 방송
31일 / 영국 BBC방송에 즈음한 논평발표
2월 5일 / 전국기독교학생회 연합 산내학살 현장방문
6일 / 전국기독교학생회 연합회 산내학살지 훼손관련 동구청 항의방문
3월 8일 / 대전산내학살대책회의 유족모임
4월 8일 / 대전산내학살대책회의 유족모임
5월 8일 / 대전산내학살대책회의 유족모임
6월 8일 / 대전산내학살대책회의 유족모임
26일 / 3차 위령제 개최를 위한 준비모임
8월 29일 / 민간인학살 사회단체협의회 발족(서울)
9월 8일 / 대전산내학살대책회의 유족모임
10월 4일 / 임시총회개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로 명칭변경
11월 7일 /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통합특별법 제정 촉구 여의도 대회 참석(서울)
11월 8일 / 대전산내학살대책회의 유족모임
12월 9일 / 대전산내학살대책회의 유족 송년의 밤 개최
<2003년>
1월 8일 / 대전산내학살대책회의 유족모임
27일 / \'민간인학살\'진상규명 인권위 진정서 제출 및 무기한 농성돌입
28일 / 민간인학살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대통령 인수위 제안
2월 7일 / 민간인진상규명 시민단체협의회 워크샵(대전)
8일 / 대전산내학살대책회의 정기총회 개최
28일 / 범국민위 피학살 유족, 전쟁․파병 반대 성명
3월 8일 / 대전산내학살 대책회의 유족모임
11일 / 한국전쟁전후 통합특별법 제정 촉구 인권위 농성장 방문
18일 / 한국전쟁전후 통합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 성명
25일 / 한국전쟁전후 통합특별법 제정을 위한 청와대앞 집회 참석
28일 / 학살지 현장 보전을 위한 보조금 지원요청 국회청원서 접수
4월 8일 / 대전산내학살대책회의 유족모임
21일 / 대전고법, 건축공사중지명령취소 소송 기각결정
5월 9일 / 대전산내학살대책회의 유족모임
14일 / 집단학살지 문제해결을 촉구하는 인권단체 공동성명
23일 / 집단학살지 문제해결을 요구하는 총력투쟁대회 개최(서울)
6월 6일 /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통합법 제정촉구 성명 발표
13일 / 산내학살지 현장보존관련 동구청장 면담
17일 /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유족 증언대회
7월 8일 / 4차 대전산내학살 희생자 위령제 개최
8월 8일 / 대전산내학살 희생자 위령제 평가모임
<2004년>
2월 5일 / 행자부 3억원 지원금 동구청 거부에 대한 규탄논평
9일 / 대전산내학살 관련 통합특별법 국회 본회의 보류에 대한 규탄논평
20일 / 한나라당 6.25통합 특별법 제정촉구 논평
3월 2일 / 대전산내학살 관련 통합특별법 부결에 즈음한 한나라당 규탄 성명
31일 / 학살현장지 훼손관련 제주지역 유족대표단 동구청 항의방문
대전산내학살대책회의 유족모임
6월 8일 / ‘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사건에 관한 법률안’ 제정을 위한 법안 공청회 개최(서울)
6월 12일 / 대전산내학살대책회의 유족모임
7월 1일 / 다섯 번째 대전산내학살 희생자 위령제 준비모임
4일 / 다섯 번째 대전산내학살 희생자 위령제
<2005년>
5월 3일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안 국회 통과
5월 21일 / 산내학살대책회의 여섯 번째 위령제 1차 준비모임
7월 3일 / 산내학살대책회의 여섯 번째 위령제 개최
<참고3> / 대전형무소 학살사건 진실 10가지 쟁점
쟁점1. 누가 학살명령을 내렸나?
미국립문서보관소에서 비밀문서(2급)로 분류돼오다 99년 12월 16일 비밀해제된 문서에는 \'처형명령은 의심할 바 없이 최상부(최고위층)로부터 내려진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이외 현재까지 확보된 증언은 당시 군 헌병대의 요구와 이우익 법무부장관의 동의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 포항 앞바다 함상에서 2백여명의 재소자를 학살,수장한 유사사건이 당시 국방장관과 내무부장관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증언이 확보돼 있다.
다른 한편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는 지난 3월 이도영 박사와의 얘기도중 \"이 사건의 내막은 당시 김창룡 특무대장이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밝혀 당시 육군 정보국에서 군복무를 했던 제이피의 이 사건에 대한 인지정도와 범위에 여전히 관심의 쏠려 있기도 하다.
이밖에도 당시 충남도지사 관사에서 신성모 국방장관, 백성욱 내무부장관 등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국무회의에서 \'대전형무소 적색수감자 2천여명,에 대한 처리방안이 논의됐음을 추정케 하는 기록(민족의 증언, 1983 중앙일보사 간)이 남아있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무총리겸 국방부장관 등이 학살 명령을 내렸을 것이라는 정황이 제기되고 있으나 대통령인지 국무회의인지를 밝혀낼 공식 문서나 증언이 확보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국방부 등 정부측의 보유문서와 미국측 보유문서에 대한 철저한 확인 조사 작업이 요구된다.
쟁점 2. 미국은 사주했나? 방조.묵인했나?
총살 집행장에 \'미군,이 있었다는 증언은 여러 곳에서 나온다. 당시 총살을 집행한 경찰이 \"총살 집행장에 미군이 포진해 있었다\"고 했고 \'미군 장교 등이 짚차 두 대에 나눠 타고 현장에 나타나 처형장면을 참관했다\'는 당시 [런던 데일리 워커]지 보도기사도 확인됐다.
사진자료에는 미군장교가 지켜보고 있는 장면도 잡혔다. 실질적인 작전권을 행사한 미군이 정치범들이 트럭에서 내리는 모습에서 학살된 뒤까지 사진을 찍은 것이다.
또 하나 학살이 이루어지기 직전인 7월 1일, 이미 미국 24사단이 대전에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도 한국군의 처형을 저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방조. 묵인 범위를 벗기 어려우며 당연 그 이상의 미국의 역할에 대해서도 많은 의구심이 일고 있다.
이와 관련 당시 학살 직후 현장을 취재한 영국 앨런위닝턴 기자는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를 통해 \'미국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ꡑ이라고 단언했다. 위닝턴 기자는 ꡐ미군 장교들이 한국군 장교들과 매일 지프차를 타고 와서 학살을 감독했다ꡑ고 기록했다. 또 ꡒ땅에 버려진 빈 담배갑들과 놓여 있던 수천개의 탄약통들도 모두 미제였다ꡓ고 덧붙였다.
흥미로운 것은 위닝턴 기자의 경우 7월 17일 대규모 2차 학살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경우 7월 13일 작전지휘권이 미국으로 이양됐음을 감안할 때 ꡐ미국 지시설ꡑ은 더욱 힘을 얻는다.
쟁점 3. 학살기간 몇일인가?
이 문제는 쟁점이 되는 희생자 수를 규명해 내는 열쇠이기도 하다. 현재 증언자들은 3일에서 보름까지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고 각 증언자에 따라 희생자의 수도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대전형무소 특경대부대장 이준영 씨(80) 등 당시 교도관들은 50년 7월 8-10일 오전까지 사흘(정확히 이틀 반나절)이라고 증언했고 해제된 미 비밀문서의 기록은 ꡒ3일동안 진행됐으며 7월 첫째 주에 일어났다\"고 돼 있다.
미국 한국전쟁 사학자인 브루스커밍스 교수는 [런던 데일리 워커]지 기사를 인용, 50년7월2일-6일이라고 적고 있다.(한국전쟁의 기원,프린스턴대학 출판부,1990년)
학살기간이 열흘이라는 증언은 우선 총살 집행 책임자(당시 도경찰국 사찰주임)인 변홍명(가명) 씨에 의한 것으로 \'처음 3일동안은 나무에 묶어놓고 죄수들을 처형했고, 그 이후에는 죄수들을 앉히거나 눕혀놓고 처형했으며, 죄수처형이 끝난 그 뒤 3일동안은 보도연맹원과 불순분자로 끌려온 5백여명을 계속 처형했다\'며 \"10여일간에 걸쳐 진행됐다\"고 밝혔다.
변씨의 주장은 당시 총살집행 책임자인데다 생생한 현장 증언이어서 신빙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산내에서 \"적어도 열흘 쯤 죄수를 싣고 들어가는 도라꾸(트럭)행렬이 계속됐다\"는 다수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해 변씨의 증언은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학살 직후 현장을 취재한 영국 앨런위닌턴 기자는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를 통해여기에 7월 4일,5일,6일 형무소와 대전 부근의 집합소에 모여 있던 정치범들이 처형됐다는 증언이 추가됐다. 위닝턴 기자는 이에 대해 ꡒ무수한 여자들을 포함해 적어도 각각 100명씩 37대 트럭분 3700여명이 죽었다ꡓ고 적시하고 있다.
쟁점 4. 몇 명이 죽었나?
현재 증언자들은 희생자 수에 대해 600여명에서 7000여명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나와 있다. 미국립문서보관소의 기록에는 1천800여명으로 돼 있다. 물론 희생자 수에 따라 학살된 기간(일수)도 달라진다.
600여명이라는 주장은 당시 정치범을 헌병대에게 내어준 대전형무소 특경대부대장 이준영 씨 등 근무 교도관들의 증언으로 \"당시 정치범을 수용하던 감방 수의 규모로 그 숫자를 산출\"한 것이다. (처형 일수 3일,7월8-10일)
1천800여명은 해제된 미 비밀문서의 기록에 따른 것으로 여기에는 \" 대전에서의 1천800여명의 정치범 처형은.. \"으로 명시돼 있다. (처형 일수 3일, 7월 첫째주)
3천여명이라는 주장은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과 무덤규모 등에 따른 것인데(처형일수 10일) 객관성과 신빙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상태다.
7천명이라는 주장은 학살 직후 현장을 취재한 영국 앨런위닌턴 기자에 의해 제기됐다. 위닝턴 기자는 7월 4일,5일,6일간에 걸쳐 수 천여명이 처형된데 이어 7월 17일 2차 학살을 통해 무수한 여자들을 포함해 적어도 각각 100명씩 37대 트럭분 3700여명이 죽었다ꡓ고 밝히고 있다.
학살기간은 증언자에 따라 50년 7월 2일부터 군.경이 후퇴하기 시작한 7월 중순경까지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는데 각기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학살이 7월 2일부터 중순경까지 계속 이어졌던 것으로 보여진다.
최근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증언자 안아무개 씨(78,경기도 거주)는 7월 2일 동료들이 희생된 것 같다고 했고 대전 대덕구 갈현리 주민은 당시 마을 희생자들이 7월 5일 처형됐다고 밝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확인결과 희생자 유가족들이 지내고 있는 제사일도 7월1일, 7월 5일 등 다양한 일자가 나왔다.
희생자가 7천여명 이상에 이른다는 결정적인 증언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던 정치범외에 타지역에서 출소됐다 풀려난 정치범들이 또 다시 붙잡혀 함께 처형됐다는 것과 정치범 외에 보도연맹원, 죄익불순분자 등 민간인 학살에 관한 것이다. 이밖에 그동안 알려진 1.2학살지 외에 3학살지(산사태로 유실됐다함)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이 같은 증언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쟁점 5. 민간인 학살 있었나, 없었나?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없었나? 이에대해 증언자들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총살집행책임자는 \" 대전형무소 학살이 끝난 뒤 보도연맹원과 좌익불순분자라는 죄목으로 연행해 온 5백여명을 처형했다\"고 밝혔고 \"상당 수의 10대 소년들도 처형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밖에도 유가족들의 증언에는 농사짓던 아버지가 형님이 전쟁이 터지자 경찰에 끌려간 후 처형됐다는 사례가 많다.
이처럼 산내에서 좌익 정치범 처형사건외에도 민간인에 대한 대학살이 함께 있었다는 증언은 \'학살의 성격\'을 달리하는 중요한 문제다. 구체적이고 풍부한 증언과 사료조사가 필요하고 긴요하다.
쟁점 6. 사건의 열쇠, 심중위를 찾아라!
당시 학살 현장 책임은 군인들이 쥐고 있었고 그 책임자가 심용현 중위였다. 따라서 정치범을 인계받고 현장 학살을 진두지휘한 심중위의 증언은 이 사건의 의혹을 푸는 \'열쇠\'라 할만하다. 그가 생존해 있다면 현재 나이는 약 80세 남짓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심중위와 그 소속부대원을 찾는 작업은 순조롭지 않다.
쟁점 7. 당시 \'수형인 명부\' 있나 없나?
수형인 명부를 찾아내는 것은 희생된 사람이 누구누구인지를 밝혀내는 자료가 된다.
일단 제주 4.3 사건과 관련자 300여명의 수형인 명부가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발견돼 군법회의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다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순사건 관련자 16명도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었다는 증언이 확보됐다.
50년 10월경 대전형무소 수형인 명부와 당시 교도관 인사카드 등도 정부기록보존소가 보존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런데도 유독 학살사건 당시의 \'수형인 명부\'만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정부와 관계기관은 \"찾을 수 없다\" \"자료가 없다\"는 등 매우 미온적인 답변 뿐이다. 정말 없는 걸까?
쟁점 8. 정부, 왜 뒷짐지고 있나?
잇달아 드러나는 한국전쟁 당시의 참혹한 실상들에 대해 정부의 태도는 매우 불성실하다.
충격적인 명백한 살인행위에 대해, 억울한 죽음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또 하나의 죄악\"이다. 당시 비극적 상황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밝혀내는 일이 상처를 아물게 하고 \'통일로 가는 수순\'임을 정부가 정말 모르고 있기 때문일까.
쟁점 9. 교회 건축 묵인, 현장 훼손 방치
2001년 10월, 학살현장 핵심부에 교회 건물(당초 ꡐ주택ꡑ으로 승인받음)이 들어섰다. 유감스럽게도 이는 동구청의 건축허가에 의한 것이었다. 유가족들의 항의로 건축중지명령이 내려지고 지난 2003년 대법원이 이를 ꡐ적합한 행정처리ꡑ로 재확인했지만 현재까지 교회건물은 불법적으로 사용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구청은 교회신도들까지의 마찰을 우려, 행정대집행 등 행정 처리를 포기하고 있다.
쟁점 10. 대전형무소 우익인사 학살사건과의 연관성
유엔군 대전탈환 직전인 50년 9월 20일 경 북한군에 의해 수감돼 있던 대전충남지역 우익인사 약 1천 2백-1천600여명이 학살됐다. 이 사건은 정부의 대대적인 반공교육의 사례로 활용돼 교재로 활용될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1950년 7월 군.경에 의한 학살사건을 떼 놓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9월 인민군에 의한 학살은 7월 학살의 보복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양대 사건의 상처를 딛기 위해서는 주검에 대해 똑같은 대접을 통해서만 전쟁의 상흔을 딛고 상생의 시대로 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