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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단체 성명논평

90년대 산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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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지리산 산적이야기 그후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 까요. 이재화 등산모임 회장    지금부터 10여년 전만해도 지리산에는 일명 산적이라 불리우던 사람들이 골골마다 능선마다 꽤 들어차 있었습니다.. 물론 먼 옛날 으슥한 고개마루를 지키며 지나가는 이들의 봇짐을 털던 산적의 의미는 아닙니다.    생각의 차이는 있겠지만, 시간에 구애없이, 산에서 밥과 잠자리를 해결하며 각자의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의미 했습니다. 도를 닦으러 들어온사람 , 속세의 인연이 싫어 들어온 사람, 그저 산이 좋아 들어온 사람등 이유도 갖가지였습니다.    물론 죄를 짓고 숨어 들어온 사람들이나 하릴없이 등산객들의 베낭에 의지해 산 생활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은 산거지라 따로 불리웠습니다. 자급과 이상(?)이란면에서 이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의 자부심이란것이 일반인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산거지와의 단순비교에서 나온 것이지만 서도요    지리산에서 현대식 산장이 가장 먼저 생긴게 노고단 산장입니다.    71년부터 근30여년을 홀로 노고단을 지키시던 함태식님이 88년 노고단산장의 신축과함께 피아골로 쫓겨갔습니다. 이후부터 지리산에 있는 산장이 국립공원 관리공단의 직영체제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96년도에 세석산장을 시작으로 장터목 ,벽소령등이 현대식 산장으로 탈바꿈 되었습니다.. 그래도 노고단산장이 새단장을 한 88년부터, 세석산장이 완공을 한 95년도까지 근 7년여동안은 노고단이후 천왕봉사이의 주능쪽에는 관리공단의 발길이 제대로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산적들의 활동시기가 바로 이시기입니다.    임결령 샘터, 선비샘터, 노루목삼거리, 세석 흙벙커, 소지봉 동쪽 움막, 천왕봉등이 이들의 주 활동무대였습니다.  참! 천왕봉의 산적은 실질적으로는 칠선계곡의 마폭근처에서 살았습니다. 먼동이 틀무렵 퉁소하나 손에 들고 천왕봉으로 올라와 당귀차를 팔고는 해질녘 다시 마폭으로 내려 가곤 했습니다. 마폭서 천왕봉으로 출퇴근한 격이니 사실상은 마폭의 산적이라 해야 되겠지요.    오늘의 이야기는 선비샘터에서 살았던 산적들의 이야기입니다.    5개월의 짧지않은 기간 동안 지리산에 미쳐 지냈던 5명의 산적들의 이야기입니다. 때론 낭만이 될수도 있지만, 어쩌면 영영 지리산속의 노숙자로 젊은 나날들을 무기력과 귀차니즘에 빠져 폐인이 될수도 있었던 산적들의 이야기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90년대 초만해도 샘이 있는 곳이면 야영이 허용되었습니다. 물론 선비샘도 30여동의 텐트를 칠 야영장소가 있던 곳 입니다. 샘을 중심으로 덕평봉쪽에 10여동의 공간이, 의신 직등루트쪽으로 20여동 정도의 공간이 있었습니다. 선비샘 산적들의 텐트는 바로 덕평봉쪽이었습니다.    아직은 산능성이에 겨울의 잔해가 곳곳에 남아있던 사월경이었습니다.    먼저 이곳 선비샘에 김털보가 자리를 잡습니다.    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반농사꾼인데, 봄이 되어 모내기가 끝나면 베낭하나 달랑메고 벼벨 가을때까지 이산저산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입니다. 심은 모는 어쩌냐 물을라치면, 그래도 벼벨때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느냐며 허허 웃는 사람입니다. 90년대 초에 선비샘을 지나본 등산객이라면 다 알만한 사람입니다.    두번째로 자리를 잡은 사람이 해외원정을 위해  하중 훈련을 하러 들어온 남원 우씨와 이씨입니다. 훈련도 훈련이지만 이곳에서 물건을 팔아 원정 경비라도 보충해 볼까하는 심산도 가지고 있었지요. 산적답지 않게 복장이며 장비들이 최첨단이었습니다. 그당시만 해도 흔하지 않던 쿨맥스 티셔츠와 파일 바지, 오바트러즈와 스틱, 산악용 피츠로이 텐트등 그야 말로 등산객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같은 산적들에겐 이방인과 다름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산적의 범주에 집어 넣어야 하는 지에 대해 몇일간의 토론의 자리가 마련되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세번째로 자리를 잡은사람이 지리산 꿀장수, 부산갈매기라 부르던 김씨입니다. 해병대 출신으로 성격이 괄괄하나 하는 짓은 영락없이 아이들 같던 사람입니다. 물론 이치는 선비샘 산적이라 부르기에는 모호한 자 였는데, 꿀따러 이곳저곳 옮겨다니다 보니 그저 선비샘에 세들어 사는 사람 정도로 치부해 왔지만, 잊혀질만 하면 어김없이 또 나타나니 그 인연만으로도 선비샘 산적으로 인정 받던 사람입니다.    네번째로 자리잡은 사람이 대전 이씨입니다.    현실도피의 성격이 가장 강했던 사람인데, 그저 미스테리한 사람으로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던 사람입니다.    이들 다섯이모여 선비샘의 산적생활이 시작됩니다.    낮에는 절대 서로에 대한 간섭이 없습니다. 약초를 캐러 다니는 사람, 석청을 따러 다니는사람, 골골을 헤메는 사람, 당귀차나 음료수등을 파는 사람, 생활도 제각각입니다. 그러다 밤이되면 달빛에 둘러 앉아 지리산 이야기와 세상이야기를 안주삼아 술독에 빠지기도 했지요. 그러나 아침이 되면 누구하나 선뜻 남부능선에서 떠오르는 찬란한 햇살을 감히 마주 볼 수 없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서 오는 두려움이었겠지요.    살아가는 방식도 이곳에 들어온 동기도 다 다르다보니 싸움 한번 할 만도 하였지만 서로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며 용케도 5개월을 버텼다 하니, 이는 지리산의 넉넉함으로 밖에는 설명할수 없었다 합니다. 어머님의 품같은 지리산이 서로 다른 이들을 하나로 보듬은 탓이었겠지요. 태풍이 몰아쳐 입산이 통제되면 지리산은 정말 적막강산 입니다. 굵은 빗방울이 텐트를 내려치고, 강풍에 신갈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려올때면 길게는 삼사일동안 텐트밖으로 한발짝도 나가지 않고 서로의 생사만 확인하며 지내던 때도 있었습니다. 지리산의 무서움이 확인되던 때이지요. 인간의 나약함이 노출되던 때이지요.    이런 일상이 죽이어졌습니다.    산능성이에는 가을이 없습니다. 바로 겨울입니다. 찬바람이 불 무렵 그들은 하나 둘 떠났습니다. 지리산에 대한 추억을 안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하나둘 정든 선비샘을 떠나갔습니다. 소금길로, 의신으로, 새골로 각자 말없이 떠나갔습니다. 언제까지 지리산에서 산적으로 살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리산이 포근하고 모든 만물들을 품어주는 산이라고는 하나 역사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민중들에 해당되는 이야기이지 지리산을 도피처로 개인적 이상을 위해 터잡을려는 사람들까지 보듬는 것은 아닐 겝니다.    그리곤 1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소식에 따르면, 반농사꾼 털보 김씨는 덕유산과 청옥산등에서 더 머무르다 지금은 동강에서 레프팅 강사를 하고 있다 합니다. 바닷가인 영덕이 고향이라는 이유를 빼면 전혀 어울릴것 같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게지요.. 남원 김씨와 이씨는 결국 해외원정은 못나갔다 합니다. 주된 이유는 경비때문 이었답니다. 김씨는 남원의 한 자동차 공업사에서 일을 하고 있고, 이씨는 지리산 관리공단 사무소 직원으로 활동하고 있답니다. 산적과 어울리는 제대로된 직업을찾은 격이지요.    꿀장사 김씨는 지금도 꿀을 딴다 합니다. 대전 이씨는 개인사업을 한다 합니다. 결국은 갖가지 동기를 가지고 지리산에 들어와 산적생활을 했던 이들 다섯명의 산적들은 그래도 성공적으로 속세의(?)생활에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삶이 힘들고 지쳤을때 누구라도 산적을 꿈꾸게 됩니다. 인연의 실타래서 풀려나와 아무의 간섭도 없는 포근한 지리산에서 유유작작 살아간다는것은 우리네의 이상향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산적생활이 종내는 무기력증과 귀차니즘을 안겨줍니다.    다섯달 동안의 짧은 산적생활후에 이들이 속세의 인연속으로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데는 일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합니다. 그래도 이들은 다행이지요. 그당시의 산적들중엔 지리산 노숙자로 지금도 지리산 속을 헤메이는 사람이 있다니까요.    일시적인 고민을 해결하러 산에 들지는 마세요. 현실의 도피처로 생각하고 산에 들지는 마세요. 내려올 때는 더많은 고민이 그대의 어깨를 짓누를 겝니다. 치열한 현실과의 싸움후에 산을 찾으세요. 그때서야 지리산은 그대의 안식처가 될것이며, 그대의 고민을 나누려 할 겁니다.    다섯산적의 한 목소리 입니다. (본 글은 오마이뉴스에 이재화 등산모임 회장이 직접쓴글을 옮겨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