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고백하면 안되나
시사에세이
김제선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지난 대선에서 정치개혁을 앞장서 다투던 정당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대통령은 재신임을 물어야할 형편에 빠졌고, 이른바 세풍 사건으로 국민에게 사과했던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도 5년만에 다시 국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재신임을 묻겠다는 대통령이나 ‘내가 차라리 감옥에 가야한다’는 전 제1야당 대통령 후보의 이야기는 국민들의 감성을 자극할만하다. 오죽하면 저럴까 싶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국민은 아직도 지난 대통령 선거에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를 모른다. 지난 여름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당 대표였던 정대철 의원의 굿모닝 시티 불법 비자금 수수사건이 불거지자 여야가 모두 대선 자금을 투명하게 공개하자고 제안했었다. 당시 민주당은 진상을 규명하기에는 한참 모자란 부실하기 짝이 없는 회계보고 내역을 국민 앞에 내놓았고, 이 때 한나라당은 이미 선관위에 적법한 절차와 규정에 따라 진실대로 대선 자금을 보고했다고 자신만만해 하며 대선 자금 공개를 거부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모른다. 최근에는 각 정당들은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식으로 버티던 자세에서 내가 한 도둑질 보다 남이 한 도둑질이 더 크다는 식의 이전투구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는 조사받아야할 범죄자의 주제에 누구에게 조사 받을지를 스스로가 결정하겠다고 호기를 부리기도하고, 적당한 조건을 붙여서 사면을 할 수도 있다는 대타협의 방안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국민들은 지금도 정치권이 반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권이 환골탈태 할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며 절망한다. 진정으로 사죄하는 마음이라면 먼저 스스로 자신의 대선 자금 일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그 진상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을 어떻게 잘못 했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잘못했다는 식의 사과로는 안된다. 이런 식은 식민 지배에 대해 공식유감을 표명하지만 곧바로 일제의 식민지배 덕분에 한국은 근대화가 되었다는 식의 뒤통수 때리기를 감행하는 일본의 태도와 다를 바가 없다.
일부에서는 대선자금의 전면 공개가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에 주름을 더 깊게 파이게 할 것이라는 염려도 한다. 돈 뜯기고 욕먹고 사법 처리 될 기업인들 처지도 안타까운 일이다. 경기도 좋지 않은 데다 외국자본의 평가가 곧 주가를 결정하는 현실에서 거액의 대선 자금을 내기 위해서 분식회계를 감행한 사실이 드러난다면 경제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러나 대선자금 문제가 불거져 나온 이번을 계기로 잘못된 관행을 뿌리 뽑는다면 한국경제의 투명성과 신뢰성이 높아지면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도 있다. 경제가 흔들려서 안 된다는 식으로 얼버무려서 선거 때마다 기업이 정치에 돈 내는 관행을 중단시키지 못한다면, 무한경쟁시대의 한국호는 아예 침몰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정치권은 먼저 대선자금 내역을 전면 공개하고 검찰 조사에 협조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느낌을, 뭔가 바뀔 것이라는 기대를 국민에게 줄 수 있다. 그래야 공멸을 피할 수 있다. 물론 각 정당이 먼저 대선자금 전모를 공개한다면 기업에 대한 검찰수사로 인한 부담도 줄어들 것도 분명하다. 그래서 각 정당에 말하고 싶다. 먼저 고백하면 안되나….
2003년 11월04일 [11:38] ⓒ 중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