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민 호소문
우리는 왜 이 빗속에 진실화해위원회를 찾았는가?
우리는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우리 국군과 경찰, 미군, 우익단체에 의해 사랑하는 부모형제자매를 잃고 지난 반백년 이상의 세월 동안 통한의 삶을 살아온 민간인 피학살자 유족들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부당한 사회적 냉대와 멸시, 말할 수 없는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이 악물고 살아 아이들만큼은 부끄럽지 않게 키우고 세금도 꼬박꼬박 내면서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왔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우리에게 안겨준 것은 부당하기 짝이 없는 연좌제, 그리고 우리 부모형제가 죽은 이유라도 알자는 소박한 요구에 대한 묵살과 탄압뿐이었습니다.
이제는 진상이 세상에 조금 알려져 아는 이도 많아졌지만, 우리 부모형제가 죽은 이유는 얼토당토않은 것들이었습니다. 단지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빨치산이 있는 산 속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살아남기 위해 부역을 조금 했다는 이유만으로, 전선에서 단지 흰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법적 절차도 밟지 않고 무참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학살당한 우리 부모형제들은 대부분 ‘빨갱이’로 몰렸고, 우리는 창졸간에 ‘빨갱이 가족’이 되어 모진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제 많이 알려졌지만, 진짜 좌익들은 모두 숨거나 월북했고 죽은 이들은 대부분 그저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만 한 순진한 농투성이들이었습니다. 더 억울한 것은 죄의 유무나 경중의 가림도 없이 무차별로 불법학살당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전시라 해도 법이 있고 전쟁규범이 있고 인륜이 있는데, 그럴 수는 없는 거였습니다. 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은 의심할 바 없는 반인도적 전쟁범죄요 국가가 국민을 불법으로 학살한 국가폭력의 극단화된 형태였습니다. 가장 비인간적인 전쟁범죄는 시효 없이 엄벌해야 한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최근 추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인간의 생명과 인권은 마지막까지 존중돼야 한다는 것이 더불어 사는 인간세상의 근본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땅 대한민국에서는 지난 반세기 동안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아픔을 거름삼아 자신의 배를 살찌우거나 나 몰라라 하면서 제 살길만 추구하거나 옛날 일은 잊어버리고 지금 어떻게 살 건지나 고민하자는 반인권적, 반사회적, 반역사적 풍조가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 귀결이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 보신주의와 이기주의와 물신주의가 팽배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물론 우리 유족들도 그런 풍조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당해온 우리로서는 나를 지키고 우리 가족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하늘도 무심치는 않은지 우리들의 절규에 많은 국민들이 화답하면서, 지난해 5월 마침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이 통과되고 12월에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족했습니다. 우리의 반백년 숙원이 풀리고 수십년 체증이 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야 우리 부모형제자매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이 밝혀지고 이제야 떳떳이 하늘을 보고 살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한껏 부풀었습니다. 우리는 유해도 없는 헛묘에, 수많은 유해들이 한데 얽혀 있는 학살지의 표석 앞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강가, 바닷가, 계곡에 술 한 잔을 올리며 고했습니다. 이제는 죽어서 아버지 얼굴을 떳떳이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이제 제사라도 떳떳이 모실 수 있게 되었다고, 이제는 자식놈들에게 ! 아버지의 죽음을 떳떳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러나, 아직 멀었나 봅니다. 우리의 고통과 염원이 아직 하늘에 닿지 않았나 봅니다. 전쟁 전후의 수천 개 사건, 100만 민간인학살을 조사하는 데 조사관이 겨우 30명 남짓이라니요? 노근리 사건 하나 조사하는 데 수십 명이 달라붙었고, 제주4.3사건 조사하는 데 40여 명이 3년간 작업하고도 부족하다고 난리인데, 그보다 수십, 수백, 수천 배 규모의 사건을 조사하는 데 30명 남짓이라니요? 반백 년도 더 지난 지난한 사건 수백, 수천 건의 조사에 그 정도의 인력을 투자하여 조사하라는 게 도대체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혹시 시늉만 내고 덮으려는 의도는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몇몇 사건이 이미 조사에 착수했다고는 하지만 진척은 더디고 대부분의 사건은 언제 조사에 착수할 건지 기약조차 없습니다. 진실화해위 위원장님께서는 사정이 맘같지 않다고만 하시는데, 반백 년 이상 오늘만 기다려온 우리는 이제 누굴 믿고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이래 가지고서는 언제나 진실이 밝혀져 억울하게 죽어간 조상들을 떳떳이 대하고, 다시는 우리 아버지 같은, 아니 우리 같은 불행한 사람들이 없어지고 모두가 평화롭고 평온한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이 올지 참으로 암담합니다.
큰물에 지치고 시끄러운 세상사들로 무척 번잡한 지금, 우리는 참으로 무거운 심정으로 진실화해위원회를 찾았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척박하다고 해도 억울하게 죽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은 없을 겁니다. 억울하게 죽고도 그 이유조차 알지 못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는 우리 부모형제자매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 이유라도 알고 싶습니다. 반백 년 이상 그 책임을 방기해온 국가는 이제라도 그 죽음의 진상을 속시원히 밝혀 알려주고 그 명예를 회복시켜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비록 한시적이나마 충분한 조사인력을 배치하고 충분한 예산 뒷받침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더불어 사는 인간세상의 초석을 놓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국민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잘못됐다면 지적해주시고, 옳다면 지지해주십시오. 사람과 돈을 주지 않고 조사하라는 것은 일종의 기만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우리 사회에 고스란히 돌아옵니다.
2006년 7월 18일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유족협의회 대표단
* 참여자치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0-06-11 1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