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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주장

참여의 길로 가자 -이동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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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의 길로 가자

 

이동규 감사

 

 행동은 생각에서 나온다.
  가치관은 생각의 뿌리이다. 즉, 우리가 하는 행동의 바탕에는 반드시 그 행동을 부추긴 생각, 즉 가치관이 꼭 있다. 그래서 가치관이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가치관이 없다. 아니 어려서부터 가치관을 몰아내는 양비론에 물들어져 왔다. 너도 나쁘다, 너는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느냐 라고 하는 풍토에서 자라온 것이다. 가치관이 없으니 당연히 행동에 자신감이 없어진다. 자신감이 없으면 남의 뒤로 숨으려만 한다.   별 소득이 없는 자리에서는 대부분 뒷자리만 찾아간다. 대학교 강의실에서도 앞자리는 텅텅 비어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누구를 존경하지도 않는다. 특히 정치가나 기업가들은 아예 존경의 대상에서 밀어내버린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렇게 발전되었는데도, 한국의 경제가 OECD에 가입할 만큼 성장했는데도 그 주역들이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풍토이다.

  여중생이 미군탱크에 죽었을 때, 대통령을 탄핵하겠다고 야당이 결의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손에 손에 촛불을 들었다. 그 부당성을 외치며 대전역 광장에 모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접 나서지는 못하고 은근히 누군가 나를 대신해주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2002 월드컵 축구 응원에서는 어떠했는가? 거기에서는 복잡한 가치관이 필요 없었다. 아주 단순하게 대한민국을 응원만 하면 되었다. 700만 명 이상의 붉은 악마가 대한민국 거리를 빨갛게 물들이면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양비론자는 사실 가장 약한 자이며 기회주의자 또는 비굴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양비론자의 대표적 특성을 보면 우선 어디에도 자신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나중에 불똥이  튈 때 나는 살짝 빠져야 하기 때문이다. 양비론자는 절대 앞에 나서서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정면이 아닌 뒷면, 즉 나중에 오리발을 내밀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온갖 실체도 없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상황 판단이 어려운 당시의 시점보다는 어느 편이 더 유리한 지 분명해진 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기가 유리한 쪽에서 뭔가를 한 것처럼 줄을 선다.

  이러한 양비론적인 풍토가 지금까지 우리를 슬프게 하였다. 남의 잘못도 지적하지 못하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분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부당한 것, 부정한 것을 보면서도 “no\"라고 말하지 못하고 ”yes\"로 덮어버리고 그 자리만 모면하는 성공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일제로부터 벗어난 지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일제청산을 하지 못한 이유도 양비론, yes man 덕분이다. 이러다 보니 매국노 후손이 선대가 매국대가로 받은 땅까지도 찾아가는 현실 속에 우리는 살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털고 일어설 때이다. 이미 수많은 곳에서 잘못된 양비론의 허상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다. 독도에 대한 일본 우익세력의 터무니없는 주장,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 지배 덕택에 더 잘 개발되었다고 주장하는 우리나라 우익세력의 준동이 대다수의 지탄을 받으며 침몰되고 있다. 돌이키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그동안 교육을 잘 시켜준 사회 지도층 덕분에 우리들은 여러 가지를 알게 된 것이다. 가치를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다. 너무 거창하게 나서면 좌절할 가능성이 크다. 조그만 것이라도 행동에 옮기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촛불 행진에 직접 나지는 못할지라도 대신 촛불을 든 사람들에게 초를 사줄 수 있는 모금운동에는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여의 첫 출발이다. 참여는 행동이다. 참여는 공생과 공존을 위한 사랑의 표현이다. 또한 내 삶의 확인이다. 아무리 엄청난 일이라고 할지라도 초 한 자루라도 사서 보태겠다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