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을 사람의 만남이 아름다운 도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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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추억의 한자리 대전지역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87년 6월항쟁 20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또한 정부도 6.10일을 “6.10 민주항쟁기념일” 로 지정하고 정부차원에서 기념식을 할 예정이다. 격세지감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87년 6월항쟁이었다고 대답하곤 한다. 당시 충남대 문과대학 학생회장으로서 항쟁의 최선봉에 섰던 나는 민주주의를 위한 숭고한 대중들의 헌신과 단결 속에서 삶의 진정한 가치를 느꼈기 때문이다. 6월항쟁 20년을 맞아 당시 투쟁의 일부를 잠깐 소개하도록 한다. 6.10항쟁을 이어가기 위해선 학교가 시험기간이어서 학생들의 호응을 얻는데 한계가 있으므로 현재는 고인이 된 당시 총학생회장이었던 故 윤재영동지와 상의한 것이 “총학생회장 단식 및 시험연기 투쟁”이었다. 시험연기 투쟁이 성공할 수 있을까하는 내부 문제제기도 있었으나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군부독재가 버젓이 장기 집권하려하는 현실에서 사회현실은 도외시한 체 시험을 본다는 것은 학생으로서의 역할이 아니다는 대의명분과 또 그간의 상황에서 학생대중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신심을 갖고 진행하기로 했다. 6월 14일, 우리 문과대학을 비롯하여 일부 단대가 결의를 봤고 단대가 결의를 보지 못한 데는 일부 과가 결의를 봐 민주광장에 모였다. 약 3천 명 정도 된 것 같았다. 학교는 시험준비 대신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으로 넘쳐났고 이 함성은 다음날 있을 대항쟁의 서곡이었다. 6월15일, 충남대 민주광장은 사기로 충만했다. 분리되어 있는 의대까지 전 단대가 투쟁에 동참한 것이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단대별로 집결하는 학우들의 모습에서 서로 환호했고 하나됨을 느끼며 감격해 했다. 약 7천 명 정도가 모인 것 같다. 학교가 설립된 후 이렇게 많은 학생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총학생장과 나, 그리고 투쟁위원장이던 김모 동지는 학우들을 단대 단위로 나눠 세 방향으로 지도하기로 하고 투쟁에 돌입. 최루탄, 지랄탄 가스와 화염병, 돌멩이가 날아들며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지던 중 페퍼포그가 뒤집어지며 드디어 저지선이 밀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유성이 해방구가 됐고 이 기회에 대전역까지 진출하기로 하고 대열을 셋으로 나눠 대전역으로 향하던 중 용문동4가에서 일단 저지를 받았으나 경찰들은 평화행진을 보장하라는 우리의 요구를 묵살할 순 없었고 우리는 드디어 대전역까지 도착했다. 도중에 시민들은 박수로 환영하며 우리의 대열에 합류했고 우리의 평화행진은 한남대, 배재대, 목원대, 대전대 등 대전 타 대학 학우에게도 전해져 같이 대전역에서 집회를 할 수 있었다. 먼 거리를 행진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승리의 기쁨과 감동으로 피곤함도 있고 시민과 함께 즉석집회를 열게 됐다. 나는 당시 사회를 보게 됐는데 갑작스런 진출이라 1만 명이 넘는 군중에 우리의 의사를 표현할 수단이라곤 소형메가폰밖에 없었으나 앞줄에 있는 분들이 우리의 의사를 반복해 전달해 주어 시민들과 함께 다음날부터 군부독재 종식을 위해 대전역광장에서 모이기로 결의를 보고 헤어졌다. 6.10항쟁이 전국항쟁으로의 기폭제가 됐던 대전시민대항쟁의 시작이었다... 양동철 (해냄부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