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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뺨' 맞고 '욕' 하던 6월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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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시절 전 기간에 어른에게 대놓고 욕지거리를 한 적이 두 번 있었다.   고등학교 때 체육교사가 첫 번째 대상이었다. 한동안 체육시간 내내 운동장 한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 했다.  학교마크가 찍힌 지정 체육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때 돈으로 한 벌 9,000원 하는 학교 지정 체육복을 쉽게 장만하지 못할 만큼 집안형편이 여의치 않았다. 체육시간마다 사제 체육복을 챙겨 입었지만 학교운동장 입장은 불허됐다.   그 날도 사제 체육복을 입고 체육수업에 임했다. 물론 운동장 구석에 끓어 앉거나 화단에서 잡초 뽑는 징벌을 감수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체육교사는 징벌대신 ‘당장 집에 가서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채근했다. ‘자식에게 체육복도 사 주지 않는 니네 부모님 얼굴 좀 봐야겠다\'는 게 이유였다.   ‘막걸리 한잔 안마시면 될 일을.. 니네 아버지도 너무한다\'는 류의 부연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순간 가슴에서 울컥 뭔가가 치밀어 올랐고 그 교사를 노려보다 ‘xxx\'하며 욕을 하고 말았다. 당황한 교사가 ‘너 지금 뭐라고 했느냐\'며 물을 때마다 나는 같은 욕을 두 번, 세 번 반복하며 확인해 줬다.   두 번째 대상은 경찰서 형사였다.   87년 어느 날 길거리를 지나다 불심검문을 당했고 선배들에게 배운 그대로 ‘법적 근거를 대라\'고 요구했다가 경찰서로 연행됐다. 경찰서에서는 입고 있던 티셔츠에 찍힌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오천봉\'이라는 글귀가 문제가 됐다. 한 형사가 ‘금강산을 찾아가?... 이런 빨갱이 새끼!’하더니 대뜸 귀뺨을 수차례 후려쳤다. ‘왜 때리냐\'는 항의 한 마디에 귀뺨을 맞는 횟수만 곱절로 늘어났다. 순간 또 다시 ‘xxx\'하는 욕이 튀어 나왔다. 또 다시 정신없이 따귀를 맞아야 했다.   그 날 주책없이 경찰서 화장실을 갔다가 전결들에게 ‘싸가지 없이 우리 상사에게 욕을 하냐\'며 화장실 바닥에 엎어져 몰매를 맞아야 했다.   때문에 87년 6월의 기억은 ‘경찰이 길을 가는 시민들의 가방을 수시로 뒤지던 풍경\'과 ‘고등학교 체육교사\'와의 오버랩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시작과 달리 기억의 끝은 언제나 흥겹다.   20년 전 나는 대학 2학년이었다. 앞선 그해 겨울을 담배연기 자욱한 골방에서 보낸 뒤였다. 동료들과 ‘광주항쟁\'과 ‘민주주의\'를 놓고 토론하다 막걸리와 소주잔을 기울이는 일로 겨울밤을 지새우곤 했다. 늘어나는 날밤 수만큼 지적 ‘목마름\'도 커졌다.     87년 6월은 사회과학 책 속 이론과 의구심에 대한 현장 검증의 장이었다. 역사, 폭압, 민중, 대중, 독재권력, 자유와 자율, 동지애, 생명, 통일, 노동, 역동성... 그 해의 아스팔트는 말 그대로 대학 도서관이고 강의실이었다. 책 속에 갇혀 있던 단어의 의미들을 길거리에서 익히고 깨우쳤다.   ‘논어\'에 나오는 배움의 기쁨(배우고 익히면 정말 기쁘지 아니한가)과 역사적 항해에 일조하고 있다는 기쁨을 만끽했다.   백골단(흰 헬멧을 쓴 무술경관)에 쫓겨 홍명상가 다리 밑에서 밤새 모기떼에 뜯기고도 다음 날 발걸음은 어김없이 최루탄 가루 속으로 향했다.   어느 날 밤에는 시위를 벌이다 앞뒤로 몰려오는 수 백 여명의 백골단에 갇혀 버렸다. 중앙로 대자피 약국 뒷골목쯤 이었는데 이미 가게마다 셔터문이 내려져 20여명의 시위대 모두가 독안에 든 쥐 형국이 돼 버렸다. 누구는 머리채가 잡혀 끌려가고, 누구는 허리춤이 잡혀 끌려갔다. 나 또한 이미 자포자기 상태로 잡히기 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경찰이 되레 얼른 집에 가라고 등을 떠밀지 뭔가.   \"야 임마. 중학생 놈이 여태 집에 안가고 여기서 뭐해!.. 여기 서 있으면 다친다. 얼른 집에 가라 얼른!\"   지나가던 중학생 취급을 받았지만 혼자서 유유히 골목길을 빠져 나왔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경찰의 눈에도 \'미소년\'이었던 내가 이제는 얼굴에 주름이 잡히고 듬성듬성한 머리칼에, 흰머리까지 수두룩하니 어느새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거다.   그래서인지 6월 항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단다. 당시 민주화 세력의 지금 모습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반응이 많다.   최근 서울대 및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10.1%가 6월 항쟁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한 대학의 경우 6월 항쟁과 관련된 인물을 묻는 객관식 질문에 박종철과 이한열을 꼽은 고려대 학생은 3.8%에 불과한 반면 23.8%는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김주열 열사를, 10.9%는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를 선택했다.   ‘민주주의 결핍양상\'은 여전한데 이미 충만하다고 느끼는 현실. 시간이 흘렸지만 그 때의 역사를 다시 읽고 그 날의 기억과 의미를 다시 떠올려야 하는 이유인 듯하다. 심규상 (대전충남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