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을 사람의 만남이 아름다운 도시로,
열린시대 새 지방자치를 만들어갑니다.
김재섭(아름다운참여팀 간사) 2018년 9급 공무원 공채에 약 20만 명이 지원했다. 선발인원은 약 5천명이었으니 경쟁률은 대략 40:1 정도다. 이런 상황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청년들이 안전만 추구한다”, “국가적 낭비다”같은 말을 쉽게 내뱉고는 한다. 대학이나 미디어에서는 공무원 시험 합격자가 나와서 “어떻게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나?”같은 성공담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용기’있게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서 창업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나와서 청년들이여 용기를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곤 한다. 정부는 청년실업의 대책으로 더 쉽게 돈을 빌려주면서 청년들이 더 쉽게 창업을 할 수 있도록 창업지원 정책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자영업자의 5년 이내 폐업률은 80%에 육박하고, 2018년 1분기 가계부채는 1468조원에 이른다. 전체 노동자의 53.1%가 한 직장에서 3년 이하로 근무하는 대한민국에서 인간답게 생존하기 위해서 ‘안정’ 추구하는 것은 열정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들이 말하고 교육하는 사회적 성공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상황을 단순히 열정부족으로 치부하는 것은 지금의 현실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사회적 성공의 기준이 일확천금을 얻거나 건물주의 자식으로 태어나거나 둘 다 안 될 경우에는 안정적이고 좋은 복지가 가능한 직장에 가는 것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무책임한 요구다. 만약 당신이 더 많은 청년과 사람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사회적 성공의 기준을 바꾸고, 사회적 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에 더 힘을 쓰는 것이 맞다. 만약 당신이 기본소득을 받게 된다면 어떨까? 기본소득은 워낙에 논쟁적이어서 실현 가능 여부부터 정당성까지 사람마다 입장이 다르겠지만 이번 글에서는 그런 논의보다는 ‘기본소득을 받는 다면‘이라는 가정 하에서 상상력을 발휘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일단 여기서의 기본소득은 지금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청년만 준다거나 아동만 준다거나 하는 방식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모두에게 지급되고, 매월 현금으로 지급된다. 그리고 ’무조건적‘이기 때문에 당신은 활동계획서나 취업 활동을 정부에 보고할 필요도 없고 당신의 재산이나 부모나 자식의 재산을 신고하고 심사받을 필요도 없다. 그리고 당신이 청소년이나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청년, 자식의 부양을 받고 있는 노인일 지라도 기본소득은 ’개별적‘으로 각 개개인에게 지급된다. 금액은 월 50만원이 지급된다고 생각해보자. 처음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고민의 시간이다. 50만원은 그 자체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지만 당장 풀타임 노동을 해야지 생존할 수 있는 상황은 면하게 해준다. 특히 청년들의 경우에는 대학진학부터 취업까지의 시간에서 다른 사람들의 간섭이 줄어들 것이다. 청년들의 삶에 개입하는 대표적인 윗사람은 ‘부모’들인데 많은 경우에 ‘부모’들이 자식의 삶을 관여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경제력과 삶의 경험이다. 이전 세대의 ‘삶의 경험’은 사회적 변화가 적은 시기에는 권위를 가지지만 지금처럼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는 시기에는 권위를 획득하기 어려워진다. 다른 수단인 경제력은 기본소득을 받는 사회에서 부모가 자녀의 삶을 개입하는 강력한 수단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할 가능성이 높다. 기본소득을 받는 다는 것은 부모에게는 자식의 미래 생계를 걱정하는 부담이 경감되는 동시에 부모의 경제력에 의존하고 있던 청소년, 청년들에게는 자율성이 증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양측 모두가 자신이 살아갈 삶을 주체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시간들이 주어질 것이다. 물론 그런 고민과 고민의 결과가 모두에게 균등하게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며 그 선택이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지도 않을 것이다. 기본소득이 모든 사람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기억해야할 것은 기본소득은 당신이 실패하더라도 지급된다는 점이다. 실패는 용인될 것이다. 또한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가 기본소득으로 인한 가족의 파괴를 너무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가족구성원의 상호 존중과 연대는 가족 결속의 수단으로서 경제력이라는 수단이 사라졌을 때 다른 모습으로 충분히 재현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은 아니고 모두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지 않을까? 다른 상상을 해보자. 기본소득을 많은 사람들이 술이나 유흥으로 돈을 흥청망청 쓰게 될까? 나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기본소득과 별개로 한국에서 술을 흥청망청 마신 역사는 항상 있었다. 아저씨들의 무용담으로 새우깡 하나에 소주 한잔이나 참치 캔 하나로 10명이 소주 한 박스 같은 내용을 들어봤을지 모르겠다. 그때는 뭐 돈이 많아서 그랬을까.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는 삶이 힘들고 팍팍 해서지 주머니에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질문을 바꿔서 당신은 기본소득 받으면 그중에 얼마를 유흥비로 쓸 것 같은가? 다른 사람들도 딱 그 정도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 문제일까? 기본소득은 당신이 무엇에 그 돈을 사용할지 검사하거나 검열하지 않는다. 각 사람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친구와 마시는 술 한 잔일지 아니면 마음의 평화를 줄 책 한 권일지 아니면 미래를 위한 투자나 저축일지는 국가나 타인이 결정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사람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고 결정권자라는 것이 기본소득의 전제다. 기본소득을 받으면 청년들이 나태해져서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게 될까? 만약 정말 사람들이 기본소득 만으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정말 일하고 싶은 사람들은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쟁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50만원으로는 풍족한 삶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한계도 있지만 기본소득을 받는다고 모든 사람들이 일을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재미있는 질문이 있는데 “만약 당신이 기본소득을 받으면 일을 계속 할 것인가요?”라는 질문과 “만약 다른 사람이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일을 계속 할 것 같은가요?”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기본소득 : 문화적 충동 Basic Income : Cultural Impulse> (다니엘 하니 & 에노 슈미트, 2008, 독일, 스위스)에서 등장한다. 영화에서 60%의 사람들은 기본소득을 받더라도 일을 계속 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30%의 사람들은 일을 할 건데 풀타임으로 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답한다. 10%의 사람들은 일단 돈을 모으고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일을 할 것 이라고 생각하나요?”라는 질문에는 80%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한번 질문을 던져보자. 당신이 만약 일과 직업이라는 것이 단순히 생계유지수단을 넘어서 자아실현과 자기실현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면 기본소득이 없는 사회에서의 직업선택의 기준은 무엇인지 고민해보자. 아마도 기본소득을 받는 사회에서 선택하는 일과 직업이 지금의 직업보다는 더 원래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이런 상상들은 상상에 불과하다. “19세기가 노예 해방, 20세기가 보편적 선거권 도입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기본소득의 세기가 될 것이다.” 라는 필리프 판 파레이스의 말처럼 기본소득이 지급되는 사회를 상상하는 것은 노예가 있던 세상에서 노예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 성인 남성만 투표권이 보장되던 사회에서 여성의 투표권이 보장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노예해방과 보편적 선거권을 실현시킨 것이 상상하기 어려운 것을 상상해온 사람들의 힘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해야한다. 기본소득을 상상하자. ** 이 칼럼은 월간지 <모두> 7월호에 기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