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동 窓> 이라크파병 저지, 아직 희망을 버리지 말자
박순성(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소장) 2003-10-22
무너진 신뢰
한국 정부는 2003년 10월 18일 오전 “여론 수렴을 바탕으로, 우리의 국익, 한미관계, 유엔 안보리 결의 등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 . . 국군의 추가파병을 원칙으로 결정하였다”고 발표하였다. 하루 전날 오후(17일 15시) 노무현 대통령은 파병을 반대하는 시민·종교단체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파병과 관련하여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파병문제에 대해서 정부 내에서 진지한 논의는 없었다. 18일 NSC(국가안전보장회의) 회의에서 처음으로 논의할 계획이다.”
그러나 같은 날 밤 한나라당, 민주당, 통합신당, 자민련은 정부의 파병 결정을 통보받았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6 주에 걸친 논의 끝에 이라크 관련 다국적군을 승인(13항)하는 결의안 1511호를 통과시킨 뒤 하루 반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이틀 뒤(20일) 고건 총리는 국회 답변에서 이라크파병과 관련한 결정―원칙적인 공감대의 형성―이 미국과의 긴밀한 협의 끝에 10월 10일 경에 내려졌다고 밝혔다.
참여정부는 ‘참여’라는 깃발을 내려야
유엔 안보리 결의안 통과 이전에 이루어진 대다수의 여론조사가 보여주었듯이, 국민들은 대체로 미국이 요청한 전투병(미국의 표현에 따르면 안정화군) 파병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렇지만 동시에 국민들 중 다수는 미국의 요청에 따른 파병이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북한핵문제를 둘러싼 북·미 갈등이 한반도 안보 상황을 불안정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국민들은 어려운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사실 지난 3~4월의 파병 논란에서 많은 국민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우리의 국가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라는 변명 뒤로 숨겨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이번에 국민들은 양심의 소리에 좀더 귀를 기울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합리적 토론의 기회를 제공할 의무가 참여정부에게는 있었다. 정치권이 마비되고 언론이 선동을 일삼는 우리 사회의 정치문화를 고려할 때, ‘진정한 참여’를 추구하는 정부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오히려 고위 관료들을 동원하여 여론을 호도하고 올바른 토론의 기회를 박탈한 다음, 이미 내부에서 내린 결정을 국민들에게 던져버렸다. 정부가 져야할 의무와 책임을 국민들에게 모조리 넘겨버린 것이다.
국익?
정부는, 전문가들은 ‘국익’을 말한다. 구태여 ‘누구의 국인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겠다. 다양한 개인과 집단이 이익의 충돌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협력을 통해 서로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국익’이 있다고 믿는 국민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는 이미 ‘국가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무수한 억압을 받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지금 우리 스스로 내용을 알 수 없는 국익 때문에 이라크침략전쟁에 동참하도록 내몰리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3~4월 파병결정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익을 챙겼나.” 미국은 파병 결정 이후에도 한국에 대해 통상압력을 멈추지 않았다(하이닉스 문제). 파병 결정이 안보불안을 해소시켜 한국의 대외신인도를 높여 줄 것이라는 환상도 이미 사라졌다. 주한미군 재배치와 철수 논의는 여전하고, 북한핵문제를 둘러싼 북·미 갈등도 부시 정부의 강경정책으로 쉽사리 해결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도대체 한국 경제의 대외신인도가 파병 결정에 좌우된다는 주장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의 대외신인도를 결정하는 첫 번째 변수는 우리 기업과 금융기관의 수익성과 건전성이다. 미국의 압력보다도 우리 사회 내부의 혼란이 대외신인도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경제정책을 포함한 모든 국가정책과 관련해 국민여론을 잘 결집하고 분배와 성장의 조화를 통해 사회통합력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민주사회에서는 민주주의의 원칙과 기반을 지키는 것이 제일의 국익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살상할 때 파괴되지 않는 양심이란 없다(민변·참여연대 기자회견문).” 그래도 세계경제가 모두 회복되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 경제만이 회복의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면 국민은 초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라크재건사업에 대한 관심은 이런 측면에서 무시할 수 없다. 만일 이라크의 재건과 민주화가 유엔 주도 하에 이루어진다면 우리도 재건사업에 참가해야만 한다. 그러나 현재는 어떠한가. 이미 미국 내 공화당과 관계가 깊은 회사들이 이라크 전후 복구사업을 거의 독식한 상태이다. 영국조차 전후 복구사업에 참여하지 못해 반발이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재건 비용을 내는 국가들에게 재건사업 참가권이 주어질 것이다. 정부 예산을 들이고 기업이 찾아오는 꼴이다. 그것도 현재의 상황에서는 확실하지 않다. 이미 규모와 성격이 바뀌어서 우리 국민경제에서 해외건설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낮아질 대로 낮아졌다. 심지어 수출입의 국가별, 지역별 의존도도 변화하고 있다. 경제는 미래를 바라보는 지혜를 요구하는데, 우리는 일어난 변화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한미관계
한미동맹을 국가 안보를 위한 절대조건으로 보는 이들에게 미국의 요청은 마치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가깝다. 자유의 수호자, 불변의 혈맹, 자기희생적 동맹국, 이러한 표현에 자신의 이성을 내맡김으로써, 그들은 한미동맹의 역사와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 모든 동맹과 마찬가지로 한미동맹은 시작이 있었고 끝이 있을 것이다. 시작에서부터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50 년 동안 끊임없이 변화해 온 한미군사동맹의 역사를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더구나 모든 강대국과 약소국의 동맹이 그러하듯이, 한미동맹은 강대국의 큰 이익과 약소국의 작은 이익이 결합된 동맹이다. ‘작은 이익’도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에 우리는 한미동맹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당분간 지켜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미동맹이 우리만을 위한 동맹이라고 말하지 말자. 국제정치에서 한편으로는 국익과 현실정치를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혈맹이니 희생이니 하는 말을 쓰는 현실주의자들의 자기분열은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우리의 의식은 한미동맹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마비되고, 합리적 판단은 공포와 맹목에 자리를 내어주고 만다. 미국이 이라크와 북한을 모두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선제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유엔 안보리에서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부시 대통령은 다시 선제공격론을 강조하였다. 우리의 이라크 파병은 미국의 이라크침략을 정당화시켜 준다. 미국 내 공화당 인사들은 이라크에 대한 공격이 정당하다면 북한에 대한 공격 또한 정당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심지어 유럽에서조차 사정은 다르지 않다. 과연 한반도에서 전쟁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북한핵문제를 둘러싼 북·미 갈등 속에서 우리는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불만을 가지고 있다. 한반도의 남쪽 주민을 볼모로 삼고 있는 북한의 강경정책이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을 지연시키고 있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동시에 우리는 미국 부시 정부의 대북압박정책이 현재의 위기를 야기했음도 잊지 않는다. 이제 한미동맹은 우리 사회의 안정을 유지시키는 조건이자 한반도에서 불안정을 야기하는 요인이다. 변화하는 세계질서, 동북아 질서, 남북관계에서 한미동맹은 이중적 성격 때문에 도전받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한미관계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남은 일’과 ‘해야 할 일’
전쟁이냐 평화냐? 부끄러운 외교인가 떳떳한 외교인가? 지난 해 말 국민은 평화를, 떳떳한 외교를 선택하였다. 세계화가 군사주의와 함께 진행되고 있는 세계질서 하에서 그리고 북·미 갈등이 한반도에서 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떳떳한 외교를 통해 평화를 달성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오직 우리 국민들의 힘이 모아질 때 변화의 계기를 만들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참여가 중요하고 민주주의가 중요하다. 그러나 정부는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다. 파병의 내용을 ‘독자적으로 결정할 것’이라는 정부의 공언조차 한·미 정상회담의 공동 언론발표문에서는 사라지고 말았다. 정부는 이제 파병을 위해 ‘남은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부가 ‘남은 일’을 걱정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파병 저지의 가능성을 발견해 내어야 한다. 정부의 파병 결정은 일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지난 봄 우리는 정부가 파병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태에서 ‘전쟁반대 파병거부’의 구호로 국민의 평화의지를 모아내었다. 비록 국회에서 파병동의안이 통과되었지만, 국회는 몇 차례 표결을 연기해야 했으며 국민 대다수의 의견과 다른 결정을 내려야 하는 부담을 져야 했다. 근거 없는 국익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던 수많은 시민들은 평화의 행진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내부에 있던 평화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으며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시민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분단된 조국에서 그동안 묶여 있던 평화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금 우리는 막연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 내부에 숨어 있는 두려움에 대해 서로 이야기해야 한다. 파병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안보가 정말 불안한지, 파병이 우리의 불안을 해소시켜 줄 것인지,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하나하나 따져보아야 한다. 가장 큰 두려움은 실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다. 하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은 껍질을 깨어 버리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스스로가 만든 환상의 포로가 될 수 없다. 환상이 사라진 곳에서 희망이 솟아오를 것이다.
우리가 평화에 대한 희망을 가질 때, 이라크 파병 반대는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미국의 이라크침략전쟁은 21세기 세계사를 좌우할 중대한 사태이다. 미국이 이라크인의 저항에 부딪쳐 동맹국들에게 파병을 강제하고 있는 현 상황은 역설적으로 미국의 단일패권이 벌써 한계에 직면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변화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편협한 국익 개념과 잘못된 현실 인식에 묶여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평화는 고사하고 진정한 국익조차도 올바르게 지키지 못할 것이다. 한국군의 이라크파병을 막음으로써 군사주의에 기초한 세계질서에 조그마한 파열을 내자.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