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은 사람】
산내 학살 진상규명 나선 동구의회 황인호 의원
\"망자의 한, 산 자의 한, 이제는 풀어줄 때\"
민·관 진상규명특위 구성… 정부도 이제 적극 나서야
이기동(본지 회보편집위원) lee9801@hanmail.net
지난 1950년 7월 8일부터 약 10여일 간에 걸쳐 최소 3000여명이 학살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전교도소 재소자 산내학살 사건의 진상은 영원히 미궁 속에 빠질 것인가?
지난 1999년 말 재미 학자인 이도형 박사에 의해 소문으로 떠돌던 대전교도소 재소자들에 대한 산내 집단 학살 사실이 미국의 공식 문서에 의해 확인된 지 3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당시 미 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대전교도소 산내학살 사건이 6.25 발발 직후인 50년 7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1800여명의 대전교도소 재소자들을 산내 골령골에서 처형했다고 명시돼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접한 대전지역 일부 시민단체의 진상규명 활동 결과 당시 발견 문서와는 달랐다. 산내 학살은 대전교도소 재소자를 비롯해 보도연맹 관련자 등 최소 3000여명 이상의 무고한 양민이 적법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처형 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학살 기간 역시 증언자들에 따르면 3일이 아닌 최소 10여 일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같은 진상조사단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아직 산내 학살사건은 그 진상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사건이 공론화 된 뒤 3년이 지났지만 대규모로 학살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도연맹 관련자는 고사하고 미국 공식문서에서 학살됐다고 확인된 당시 대전교도소 재소자 명단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대전 동구의회가 의회차원의 진상조사단 구성을 위한 준비작업을 하고 있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아직 준비단계이긴 하지만 연내 진상조사특위 구성을 추진하고 있어 그 동안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던 관차원의 공식적인 첫 활동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에 동구 의회 산내 학살 진상조사특위 구성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황인호 의원(삼성동, 2선)을 만나 진상조사단 구성과 향후 활동계획에 대해 들어봤다.
다음은 황 의원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 산내 학살 문제에 관심을 갖게된 계기는 무엇인가?
\"산내 학살 문제는 현대 정치사 속의 지난한 문제이다. 최근에는 이곳에 도로가 확·포장되고 교회가 들어서면서 학살지역이 훼손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제주 4.3 항쟁에 대해 진상규명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산내 학살 진상규명 작업은 늦은 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사상 시비이전에 인간의 존엄성 차원에서 진상규명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산내 학살 문제가 지역사회의 이슈로 불거진 지 벌써 3년여가 지났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 의회 차원의 진상규명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인가.
\"산내 학살 문제가 제주 4.3항쟁처럼 제주 도민만이 아니라 범 국민적인 공론의 장으로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주 4.3 항쟁의 진상규명 작업이 학계나 민, 관, 정 모두가 함께 동참하는 가운데 공론화의 장을 마련하면서 가닥을 잡았다. 반면 골령골 학살사건은 자칫하면 공론화 이전에 사상시비 문제로 인해 이 문제를 거론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던 기간만큼이나 진상조사 기간이 걸릴 것이고 다만 현장 보존은 빠를수록 좋다.\"
- 타 시도의 일부 지자체에서는 이런 문제와 관련 이미 진상 조사위 등의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들과의 교류는 있었나?
\"의회 전문위원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특히 영동군 의회 특위구성을 배우고 있다. 그러나 산내학살의 경우 단순히 노근리사건
같이 양민으로 분류되지 않고 사상적 시비도 있기 때문에 제주 4.3 진상규명 과정 등을 눈여겨볼 필요도 있다. 거창, 함평의 경우도 비교해볼 작정이다.\"
- 보다 실질적인 진상조사를 위해서는 산내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전후 민간학살 진상규명위의 활동과 더불어 국가 차원의 진상 조사활동이 이루어 져야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대통령 직속 기구로 설치돼 많은 성과가 있었다. 물론 한시적 활동 때문에 한계 있었고, 한편으로 권한 자체가 부족해 어려움 있었지만 전례 없는 의문사위 의 활동을 통해 미궁에 빠졌던 사건이나 사상적 희생 많이 노출돼 성과 있었다. 궁극적으로는 6.25 전쟁 전후의 학살문제에 대한 진상규명은 역사를 바로 세우는 차원에서 다뤄져야 할 문제다. 그런 것이 안 다뤄지고 피상적으로 쉽게 좌우 대립으로 몰아간다면 안 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망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계기가 되지만 또 한편에서는 억눌려 살아온 산 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다. 국가는 그 당시나 지금이나 국민의 국가이고, 또 더 발전된 시민이 국가라 한다면 그 당시 잘못을 뉘우치는 것으로 스스로가 국민들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밝혀줘야 국민을 믿게 해주는 것이다.
* 참여자치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06-18 1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