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을 사람의 만남이 아름다운 도시로,
열린시대 새 지방자치를 만들어갑니다.
- 글 : 염대형(우리단체 시민참여팀장) 주간회의를 앞두고 금홍섭 처장이 한겨레 1면에 서태지와 아이들 20주년 기사가 나왔다고 말한다. 시간이 낯설다. 영원히 청춘일 줄 알았던 서태지가 불혹을 넘겼고, 나도 나이를 속일 수 없는 얼굴이 됐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음악이라는 문법을 통해 세상에 나온 지 20년이 됐다. 그저 수치로만 다가왔는데, 앉은뱅이 술처럼 몸이 무거워진다. 상념에서 깨려면 이들에 대한 추억이 필요하다. 20년은 지구의 역사에 비할 바 못되지만 사람의 시간으로 따지면 꽤 긴 세월이다. 서태지라는 상징은 나에게 자유롭지 못하다. 좋든, 싫든 그는 우리 삶에 영향을 미쳤고, 서태지 세대라는 별칭까지 안겨주었다. 지금도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TV 특종 연예〉를 통해 첫 선을 보인 그들은 앳되고 수줍었다. 지금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처럼 서태지와 아이들도 가혹한 심사평과 낮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혁명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말 그대로 광풍이 일어났다. 1992년 내내 곳곳에서 「난 알아요」와 「환상 속의 그대」가 울렸고, 고교 자퇴인 서태지는 또 다른 성공신화를 창조했다. 인간극장, 몰래카메라는 서두에 불과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방송에 종속된 을이 아니었다. 2집 이후 갑의 입장을 획득한 그들은 감히 공중파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도 통쾌하게 기억하는 장면이다. 1996년 은퇴할 때까지 불과 5년을 활동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우리 대중음악의 제대로 된 담론을 잉태했고, 온갖 논쟁과 가십거리를 넘어 문화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 버린다. 사전심의제도 철폐를 뒤로 하더라도, 서태지와 아이들이 중요하게 화자 되는 이유는 작가주의 시대에서 상업주의 시대로 전환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서태지 이전의 대중음악이 자기 어법을 무기 삼아 보편적인 예술성을 지향했다면, 서태지 이후의 음악산업은 오로지 기획 상품을 통한 이윤창출의 도구로 음악을 변형시킨다.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이후, 대형음반제작사는 음악산업을 철저하게 자본 논리로 전환했고, 지금도 무수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아류작들을 재생산하고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본인이 원했든, 원치 않았던 간에 아이돌 산업의 표준 모델이 됐고, 언론에서 떠드는 한류의 선구자로 기록된다. 1998년 서태지는 은퇴 2년 만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다. 이후 꾸준히 앨범을 발표하며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만큼의 영향력은 사라진지 오래다. 이영미의 말마따나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아 주었으면 하는 욕망을 계속해서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다만 그가 아직까지 건재한 문화권력이란 건 부정할 수 없다. 작년 4월 터진 서태지 이지아의 이혼 보도는 대통령의 부끄러운 사건까지 덮을 정도로 커다란 파급력을 행사했다. 서태지에게는 분명 명암이 존재하지만, 공과를 떠나 음악만큼은 소중하다. 나는 아직도 「난 알아요」가 나오면 어설픈 회오리 춤을 추고, 빅뱅을 따라하는 아들에게 서태지의 CD를 내밀며 우쭐거린다. 그 지옥 같던 고 3 봄, 서태지와 아이들은 비상구 없는 좁은 계단의 통로였고, 일탈하고 싶던 욕망을 대신해 줬다. 분명한 건 우리는 그의 음악을 향유했고, 앞으로도 그의 노래가 나오면 춤을 출수밖에 없는 운명을 부여받았다는 점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20주년은 분명 축하할 일이지만 비단 그들만의 영광은 아니라는 것, 동시대를 같이 산 우리의 생존 노력과 부끄러운 성장사까지도 같이 평가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