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을 사람의 만남이 아름다운 도시로,

열린시대 새 지방자치를 만들어갑니다.

회원사업

시시껄렁한 세상 - 그냥보기훈련생 참가이유서
  • 211

첨부파일

서진배(회원, 시인) 지난밤은 초생달이 점멸한다. 현관문을 열고 마당 한 켠에 놓인 의자에 앉는 사이 초생달은 켜졌다, 꺼진다. 구름의 속도로. 담배를 피우는 10센티미터의 시간동안 초생달의 점멸은 기억의 점멸로, 기억의 점멸은 그리움과 외로움의 음가적 차이점에 대한 구분법으로 이어진다. 손톱에 뜬 초생달의 사연에 대해 안쓰러운 눈빛을 내려보낸다.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을 때, 공작용 수수깡을 태우는 연기를 마신다. 거꾸로 물고 붙인 담배의 맛은 가장 객관적이다. 담배가 타들어가는 10센티미터의 시간동안 실재한 것은 무엇일까? 기억과 그리움과 외로움의 음가적 차이? 손톱에 뜬 초생달의 사연?. 다만 담배필터의 그을린 맛일 뿐.    쇼파를 타고 투니버스를 항해중인 승효에게 “다 함께 볼 수 있는 채널로 가지?” 그러면, 승효는 나에게 뻑뀨를 날리며 “지금 눈 앞에 보이는 만화는 보이지 않아?” 그런다. 잔뜩 성질난 아기의 꼬추같은 가운데 손가락을 잘라달라 하고 싶다. 승효가 날린 가운데 손가락을 목걸이로 하고 다니고 싶다. 대롱대롱. 승효의 뻑큐는 욕이 아니라 입안 침샘을 자극하는 복숭아 속살같은데, 승효의 투니버스는 내 눈에는 도무지 해독불가능한 이미지들인 이유가 무엇일까? 함께 볼 수 없는 채널이 돼버린 이유, 나는 보고 싶은 대로 대상을 볼 뿐이다. 마트에 쌓여진 살구를 골라 비닐봉지에 담듯. 내 얼굴에 장착된 두 개의 눈동자는 몇 년식 버전이 프로그래밍되어 있는가? 아들이 날린 가운데 손가락을 선물로 받아 목걸이로 하고 다니는 시인, 이런 시인이 인류에게 온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얼마나 시인이라는 인증샷은 매력적인가. 돌덩이 속에 깃들어있는 돌의 요정을 조각할 수 있고, 숲을 이루는 것이 나무들이 아니라 나무와 나무의 사이들임을 볼 수 있는 허공에 떠다니는 시인의 눈동자. 올라탄 버스의 손잡을 잡는 순간 사소한 운명의 일상을 붙잡을 수 있는 순발력. 있을법한 탑승기 간발의 차이라는 관용구처럼 버스에 오르거나 오르지 못하거나 운명은 그렇게 일상적이다 365번 버스 탑승자들은 365번 표정으로 달린다 365번 노선표를 달리면서 진성약국에서 멀미를 앓고 목행역 국민은행 앞 사거리에서 신호대기중 대출금 상환날짜처럼 금방 돌아오지않는 파란 신호를 기다린다 차창에 표정을 찍는 사람, 찧는 사람, 찢는 사람 365번 표정들 사이로 365번 표정으로 내가 들어간다 아무리 올라타도 365번에는 사이가 있다 살짝살짝 몸을 움직이면 생기는 사이 살짝은 그래서 살짝이 아닐지도 모른다 올라탄 버스가 출발하자 뻐걱 몸이 꺾인다 어깨에서 빠져버린 손이 손잡이를 붙잡는다 동그랗고 미끈거리고 딱딱한 버스 손잡이에 동그랗고 미끈거리고 딱딱한 체온이 묻어있다 몇 페이지의 불안이라면 귀가하지 않은 달도 붙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라는 음절을 닮은 버스 손잡이는 똥꼬를 오므리듯 입술을 오므리듯 온기가 새나가지 못하게 했겠지요 얼떨결에 우리라는 말을 붙잡으면 동그랗고 미끈거리고 딱딱한 미열이 전염됐지요 오라이 하면 오므린 몸들이 한 쪽으로 쏠리던 버스 만원어치 동그라미를 싣고 바퀴는 굴러갔지요 세균처럼 번식하는 체온에 감염된 365번 표정이 365번들 사이에 서서 관성적으로 흔들릴 뿐, 365번 노선버스의 운명은 간발의 차이로 하루짜리 신문에 오르거나 관용구같은 일상이거나 태양이 10초간 꺼진다. 6월 왕버즘나무의 이파리가 여전히 초록을 걸어가고 있는가, 폐지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의 얼굴에 황사의 표정이 번식하고 있는가, 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퍼먹고 있는 천복순대국의 국물 위에 녹물같은 돼지기름이 떠다니는가? 태양을 끄듯 나도 내 눈동자의 스위치를 점멸해야 할 계절이다. 지금까지 내가 본 세상은 내 눈동자 안의 세상일뿐. 이별하고 돌아가는 자의 눈동자에 담긴 왕버즘나무는 새벽 담배연기빛이 번지고, 폐지수집업의 라일벌인 김노인은 이노인의 얼굴에 언제나 풋살구가 열려 늘 배앓이 현상을 일으킨다. 천복순대국밥의 돼지비린내 앞에서 구역질을 하는 애 밴 여자의 무례함에 대해서 나는 도무지 이해불가, 납득불가다. 그런데 어설프게 세상을 자신의 눈동자 안에 재구성하려는 습작생이 있는가 하면, ‘죽은 새의 시체를 핥는 늙은 고양이 앞에서 모든 게 역겹다’(허연 ‘고양이와 별똥’ 중)고 구역질을 일으키는 시인도 있다. 죽은 새의 시체를 핥는 늙은 고양이 앞에서 모든 해석을 무장해제 당하는. 담배가 타들어 가는 10센티미터의 시간 동안 초생달은 대기권 밖에서 제 속도의 보폭으로 걸어갔으며, 구름은 제 나침반의 방향으로 제 날갯짓의 풍속으로 스쳐지나갔을 뿐이다. 다만 담배 한 개피 타들어가는 10센티미터의 시간 동안 그/냥/보/기가 힘들다. 이것이 그냥보기훈련생의 참가이유이다.   --------------------------------------------------------------------------------------------- 위의 글은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회보 \'참여와 자치\' 5+6월호 회원연재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