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을 사람의 만남이 아름다운 도시로,

열린시대 새 지방자치를 만들어갑니다.

회원사업

거침없이 인터넷 ⑥ We wish you good luck(건투를 빈다)
  • 188

추명구(회원, 위시웹 대표) 회보 “참여와 자치”의 마지막 원고를 쓰고 있다. 그동안 글쓰기의 시간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었고, 새로운 생각을 찾는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기고”라는 의무적 글쓰기(?)가 아니더라도 글쓰기의 작업이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리고 오늘은 나의 이야기로 마무리 하려고 한다. 나는 97년도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인디밴드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 그 시기에 나는 두 가지 큰 사건을 겪었는데 한 사건은 4학년만 3년을 다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IMF 경제위기가 아픈 가족사의 발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상은 늘 지루했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 컸던 시기였다. 그날도 민중가요 신보를 사러 인문사회과학서점에 들렀다. 나는 진열대 앞에서 새로운 음반을 발견했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글씨로 “INDIE”라는 로고가 새겨진 앨범인데, 앨범 자켓을 보는 순간 구매력이 확 땡겼다. 대체로 인디의 음악은 예쁘지는 않았지만 일상의 다양한 소리를 접할 수 있었다. 나는 인디밴드의 음악적 감수성에 빠져 들고, 전집을 모으듯 앨범을 수집하고, 대중음악잡지 “서브”, “팬진 공”, “대중음악서적”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행위가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었고,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가 밥을 먹고 육체의 힘을 얻듯, 문화를 통해 욕망의 힘을 얻는다. 그때는 왜 인디밴드의 앨범이 사회과학서점에서 판매 됐는지는 몰랐지만, 유통을 통해 결핍된 공간으로의 이동이 왜 중요한지, 창조적 행위가 주류, 비주류라는 경제적 가치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인디 레이블(independent label)은 음반 제작과 유통이 독립된 음반사를 말한다. 더 풀어써보면 주류 음악(당시 발라든, 댄스 등)이 아니더라도 뮤지션의 자유로운 창작활동과 실험성을 존중하고, 저예산으로 음반을 제작하고, 유통을 통해 대중을 만나게 하는 산파 역할을 했다. 또한 대중은 인디 레이블을 통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듣을 수 있었다. 나는 인디 레이블이 지금의 웹(구체적인 내 의견은 블로그라고 생각한다)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표현의 자유”의 문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웹을 활용하고자 하는 마음과 간단한 조작법을 알고 있으면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것처럼 숙련된 기술이 없어도 되고, 사이트를 운영하기 위해 큰 경제적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유통 역시 콘텐츠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채널로 시도하면 된다. 솔직히 요즘은 웹 활동에 중요시 되는 것은 매체를 이용하는 자세다. 과도한 상업성과 특정인의 글도배가 피로감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인디(자영업 및 문화관련업)가 많다. 대중음악 글쟁이 대형씨, 시인 진배 형, 최근에 과일가게와 재활용센터를 오픈한 민형씨와 기영씨, 예술영화 극장주 민구 형,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모여서 만든 여인숙 은덕씨, 이주여성들과 함께 음식점을 운영 중인 봉구 형, 공정여행 고사장님, 동네에서 무언가를 양운이 누나 등등 5인 이하의 팀을 구성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나도 홈오피스 4년차 박리다매 프리랜서다(박리다매 프리랜서는 해석하기 나름이다).   이분들 역시 구체적인 삶에 대한 어려움이 있겠지만 난 그들의 열정과 구력을 믿는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접어놓은 소소한 이야기가 가치 있는 콘텐츠라고 생각한다. 그 이야기는 내가 인디밴드의 음악을 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욕망이고 즐거움이다. 그리고 이 땅의 수많은 청춘들의 별곡이다. 자! 나의 글은 여기서 끝나지만, 수많은 사연들은 오늘도 뉴미디어를 통해 역동적으로 유통된다. 그 사연을 창조하는 자던, 골라서 욕망과 즐거움을 불태우는 자든 나를 포함해 모두에게 건투를 빈다. 행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