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을 사람의 만남이 아름다운 도시로,
열린시대 새 지방자치를 만들어갑니다.
취재 및 글 : 고제열(회보편집위원장) “결혼하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생활하다가, 부녀회장이 되면서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어요.” 본인은 언제나 청춘이라고 소개하는 이금자(50)회원은 인터뷰 내내 십대소녀처럼 수줍은 모습을 보였다. 금산이 고향인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으로 이사 왔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던 그는 돌연 3년을 마치고 중퇴 했다. 서울서 방직업을 하는 오빠의 일을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오빠의 회사에서 20대 청춘을 바쳤지만, 오빠가 갑자기 암으로 사망하면서 다시 대전으로 내려왔다.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기로 결심한 그는 서점으로 책을 사러 갔다가, 덜컥 서점에 취직을 하게 된다. 2년을 근무한 그는 결혼과 동시에 평범한 주부가 되었다. 중리동에서 송촌동 선비마을로 이사한 그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1,872세대가 거주하는 대단지 아파트의 부녀회장이 됐다. “나와 내 가족만을 알고 살다가 지역의 소외된 이웃의 삶도 돌아보게 됐다”는 그는 “지역공동체를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는 삶을 살게 되어 기뻤다”고 말했다. 그렇게 주민자치와 주민들의 편안함 삶을 위해 봉사하던 그를 눈여겨 본 김원웅 당시 국회의원의 눈에 띄어 김원웅 국회의원의 사무실에 취직을 하게 된다. 국회의원을 보좌하는 일을 하게 되면서 더 큰 세상을 보게 된 그는 2006년 지방자치선거에서 비레대표 후보로 대덕구의회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당선 되지 못했다. 이후 그는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편입했고, 대학 졸업 후 방과후 아동센터를 운영하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중 그는 2011년에 대덕구의회 보궐선거에 지역구 후보로 다시 출사표를 던지고 직접 선거운동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당선되지 못했다. 그는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평소 틈틈이 배웠던 꽃꽂이 기술을 살려 ‘승리플라워’ 샵을 열었다. 한 남편의 부인으로 두 남매의 어머니로 평범을 삶을 살고 있는 그는 “내가 직접 의회에 진출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 아니 지역의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을 열심히 돕고 있다”며 “내가 나쁜 짓 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것도 깨어있는 시민의 작은 힘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20년간의 테니스 경력과 MTB를 즐긴다는 그는 많이 웃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고 밝혔다. 2012년에 대전참여연대의 회원이 된 그는 “대전참여연대가 사회를 맑고 밝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며 “민주주의 기둥이 되어달라”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