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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광진 회원(교사, 대전교육연구소 소장) “교육민주화 투쟁과 함께 성장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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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및 글 : 고제열(회보편집위원장) “교육민주화 투쟁을 하면서 시민단체의 도움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의 집행위원을 수락했어요. 그러다 의장도 하게 되었네요.” 성광진(58) 전의장님은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우리단체의 공동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제대로 된 권력감시 시민운동단체의 의장으로서 중책을 맡아 많은 책임감을 느끼고 자부심을 가진 시간이었습니다”라고 지난 시간을 회상했다. ‘성광진’하면 교육민주화 투쟁의 현장에 늘 존재한 인물로 정평이 나있다. 그의 교육민주화 투쟁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충남 홍성이 고향인 그는 9세에 대전으로 이사를 왔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그가 교사로서 처음 부임한 학교는 대전 00고등학교였다.  하지만, 교장 및 이사장의 횡포에 맞서면서 경영진과 대립관계로 형성했다. 이후 대전00중학교로 강제 발령을 받게 됐다. 이에 그는 학교 내에서 혼자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인식, 민주화를 위해 행동하는 다른 이들과 함께 조직을 만들어야 하는 필요성을 실감하게 됐다. 교사협의회의 태동을 지켜보던 그는 1987년 민주화투쟁을 겪으면서 교육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1988년 대전교사협의회 산하 대전 사립교사협의회 조직부장을 맡았다. 이후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창립되면서 그의 교육민주화에 대한 의지는 더욱더 불타올랐다. 입시경쟁위주의 교육에 대한 개혁요구, 일선 학교의 비민주적운영에 대한 개혁요구 투쟁의 현장에 그는 늘 존재했다. 집회에 참여한 것이 문제되어 재단으로부터 전교조 탈퇴요구를 받으면서도 활동을 계속 했다. 그러던 중 1991년 학교에서 해직됐다. 이후 기나긴 복직투쟁을 전개했고, 5번 복직, 5번 해직을 반복했을 정도의 그의 고단한 투쟁은 쉼이 없었다. 이러한 투쟁 끝에 그는 1998년 교육감의 공립계 특채 정책으로 인해 대전중학교에 발령을 받게 됐다. 하지만 그는 “제가 해직된 학교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라고 그 때를 회상했다. 2000년 전교조가 합법화 됐고 그는 초대 사무처장을 맡았다. 이 당시 사립학교의 정상화 투쟁이 많이 발생했고, 그는 그 많은 학교의 정상화투쟁과 함께 했다. 2005~2006년 전교조 대전지부장이 된 그는 동명중학교와 새일고의 정상화 투쟁 및 장애인교육의 내실화를 위한 교육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또한 친환경학교급식지원조례 제정운동, 사설모의고사폐지, 야간자율학습 시간 단축 등의 교육정책을 이끌어 나갔다. 참여연대와의 인연에 대해 그는 “빚을 갚고 싶었어요, 그래서 시민단체의 활동을 열심히 한 것 같아요”라며 “교육운동단체와 시민운동단체의 연대에 연결고리가 된 것 같아 참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대전복수고등학교에서 국어를 담당하고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간이 끝나면 그는 대전기독교연합봉사회회 5층에 있는 사단법인 <대전교육연구소>로 또 출근한다. 교육정책을 연구하고 좋은 교육제도 대안을 발굴하기 위한 단체인 <대전교육연구소>는 지역의 시민, 교사, 교수 등이 참여 하고 있다. 그는 현재 소장을 맡고 있다.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창립 20주년 소회를 묻자 그는 “앞으로도 시민들에게 인정받고 많은 지지를 받는 단체로 성장하길 소망합니다”라며 “상근활동가들의 복지확대를 위한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밝혔다. 그의 가족으로 전업주인이 배우자와 대학원생 딸, 대학졸업반인 아들이 있다. 교육민주화를 위해 온몸을 던졌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그에게 퇴직 이후의 계획을 묻자 그는 “여행하면서 글쓰고 싶어요”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