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을 사람의 만남이 아름다운 도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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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및 글 : 고제열(회보편집위원장) “변호사가 안 되었다면 아마도 프로기사가 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혹시 기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우리단체 감사를 맡고 있는 송동호 회원(53)은 현재 직업이 변호사이다. 어릴 적부터 특별히 모나지 않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던 그는 부모님과 주변에서 권하는 바대로 법대에 들어갔다. “저도 뭐 특별히 싫지 않았어요. 법조인이 되면 나중에 사회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할 것 같았고요”라고 말하는 그는 82학번이다. 그 당시는 유신시대. 맘 편히 낭만을 즐기면서 학업에만 집중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민주화 시위도 많이 벌어지고 학내에는 사복경찰들이 상주하던 시절. 다른 이들이 감옥에 끌어가던 일이 비일비재하던 시절 혼자 사법시험에 몰두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고 한다. 사회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등을 많이 하고 행동하면서 지내다가 대학 4학년 뒤늦게 사법시험를 준비했다. 이후 대학원에 진학을 했고 마침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군은 법무관으로 복무를 했고, 사업연수원을 졸업하고 본격적인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사법연수원에서 기본권학회, 노동법학회 등등의 학회 활동을 하면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더 많이 가졌어요. 또한 민변 선배들과 자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변호사의 길로 방향을 틀었어요.”라고 말하는 그는 서울에서 고용변호사로 일하다가 1995년 대전에서 개업을 했다. 우리단체의 창립 멤버이기도 한 그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회(민변) 대전지부의 사무처장을 맡으면서 공안사건을 맡아 대학생·노동자의 변론을 맡는 일들을 했다. 또한 우리단체의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장을 맡아 공익소송을 발굴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교육감을 간선제로 뽑을 때, 헌번재판소에 위험심판청구를 낸 적이 있었어요. 비록 패소했지만, 그 당시 판결문에서 교육감 직선제의 필요성을 언급한 부분이 있었어요. 이후 정치권의 움직임으로 결국 교육감 직선제가 성취되었고요”라고 말하는 그는 또 “한전의 전기 공급 약관의 위헌소송도 진행했었어요. 산업용과 가정용 전기요금의 부과체계가 불합리하다고 주장했죠. 하지만 이 또한 그 당시에는 패소했지만, 전기공급약관의 개정 필요성을 언급되었고 이후 아파트의 전기요금이 인하되는 결과를 가져왔어요”라고 그 당시 활동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또한 2007년부터 2년 동안 ‘납북자 피해자 보상지원 심의위원회’의 위원으로서 납북어민 가족들의 피해보상을 위한 활동도 한 바 있다. 올해로 변호사 생활 25년째인 그가 변호사가 안 되었다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초등학교 때 바둑을 많이 좋아했어요. 한번은 학교도 안가고 바둑만 둔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버지한테 들켜서 바둑판이 빠개지는 상황까지 갔어요”라고 과거를 회상하는 그는 “대학 때 신문기자 하는 선배가 그렇게 멋있어 보여서 신문기자의 꿈을 가져본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쪽으로 가지는 못했어요. 아마 갔다면 해직기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선배도 언론민주화를 외치다 해직이 되었거든요”라고 말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변호사 안하고 프로기사 하겠다는 그는 지금은 다른 생각 안하고 오로지 변호사의 길을 가겠다고 한다. 전민동에 거주 하고 있는 그의 취미는 바둑과 자전거 타기. 날이 좋을 때에는 자전거로 출퇴근도 하고 대청댐까지 라이딩을 즐긴다고. 가족으로는 대학원에서 강의하는 배우자와 경제학을 공부하는 아들, 중학교 3학년인 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