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을 사람의 만남이 아름다운 도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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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회원, 민들레의료생활협동조합 부이사장)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시고 매일 산에 다니셨다. 주말이 되면 아버지를 따라 도솔산을 넘었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수업료를 낼 때 즈음이면 학교가기가 너무 괴로웠다. 아침마다 선생님은 수업료를 납부하지 않은 아이들 이름을 불러 세우고 언제까지 납부할 것인지를 물었다. 난 대답할 수가 없었지만, 대답하였다. 그리고 그 약속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초초해졌다. 다시 불러세워질 때, 반 친구들의 동정의 눈빛을 받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온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그때부터 아버지를 미워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어떤 돈벌이도 하지 않으시고 산에 다니셨다. 어머니는 강직성척추염 때문에 가끔씩 혼절하도록 고통스러워하셨고, 또 그만큼 돈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셨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4남매를 어머니가 혼자 감당하셨고 아버지를 원망하시며 우셨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아버지가 정말 미웠다. 스물일곱, 출가를 하고 절생활을 할 때, 어느날 기도를 하다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은사스님이 왜냐고 물었다. 아픈 어머니 생각에 그랬다고 답했다. 스님은 어머니가 왜 병에 들었는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황당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스님을 믿었기에 의사도 아닌 나는 어머니가 병이 든 이유를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스님은 틈날 때마다 물었다. 나름 생각한 것을 답했다. 그러면 스님은 더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벼락같이 아버지와 도솔산을 누비던 어느 겨울날의 장면이 떠올랐다. 집에서 키우던 개 덕구랑 아버지랑 나랑 눈밭이 된 도솔산을 미끄럼 타며 오르내리던 기억. 아버지와 나와 덕구가 미친 듯이 웃고 짖으며 한 몸이 되어서 미끄러져 내려가던 산길. 그렇게 도달한 갑천 상류는 꽁꽁 얼어붙었고 돌덩이를 내리쳐 물고기를 잡던 장면이 떠올랐다. 중학교시절부터 미워하기로 작정한 아버지. 그래서 나를 볼때마다 귀여워 어쩔 줄 모르던, 언제나 손잡고, 무등 태우고 다니며 동네방네 막내 자랑을 하던 아버지는 새카맣게 지우고 있었는데. 아픈 어머니를 생각하며 울었던 눈물의 10배는 울었던 것 같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줄줄 흘렀다. 50대 남성이 야심차게 시작한 사업에 실패하고 겪었을 좌절, 무기력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때 그 외로운 아버지를 어머니는 더욱 외롭게 하였다. 어머니도 힘들어서 그랬겠지만 아버지는 어디 맘붙일 때가 없었을 것이고 산에 다니셨을 것이다. 사타구니가 거뭇해지고 머리통이 굵어지기 시작한 막내아들의 싸늘한 눈빛과 무시, 그렇게 멀어져가던 막내를 견뎌야 했던 아버지를 생각하니 죄책감이 온몸을 지배하였다. 그리고 너무나, 너무나 죄송했다. 아버지가 안쓰럽고 불쌍하였다. 실의에 빠진 중년 남성의 약한 마음이 내 몸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에게 도솔산과 갑천은 그렇게 남다르다. 나는 아직도 도솔산의 설경이 떠오르고 아버지와 덕구가 선명히 떠오른다. 떠오르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여전히 흔들리고 잘못하고 어리석은 나는 이 장면을 회상함으로써 중심을 잡는다. 나를 사람답게 하는 기억이다. 만약 그곳이 콘크리트 아파트였다면, 그곳에서도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셨겠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으로 떠올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난 이것이 자연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사연의 세계에 자연의 세계가 결합할 때 인간은 자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생각들이 자라는 것이다. 도대체 그 영원한 자연의 가치를 지금 당장의 돈의 이해관계로 팔아먹으려 하는 시대. 그 시대를 용서할 힘도 어쩌면 도솔산과 갑천이 내게 내려준 신령스러운 선물이다. 아파트는 충분하다. 아니 넘치고 넘친다. 이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산이고 졸졸 흐르던 냇가이다. 그게 우리에게 아파트로는 댈 수도 없는 더 큰 돈을 만드는 시대인 것을 왜 모르는가? 당장의 쾌락을 위해 영원한 평화로움과 아름다움, 안식을 주는 가치있는 것들을 팔아먹을 수 있는가? 암투병중인 아버지가 아직은 움직이실 수 있을 때, 어릴적 이야기하며 도솔산을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