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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민주주의학교] 한홍구의
  • 관리자
  • 2021-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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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27일 하나은행 대강당에서 있었던 대전민주주의학교 한홍구 교수님의 “광주 30년 무엇을 할 것인가” 강의 녹취록입니다. 감동적인 강의를 해주신 한홍구 교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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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잘 들리세요. 사무처장님 빔 좀 꺼주시죠. 반갑습니다. 지금 막 시작하면서 여러분 들게 평화박물관 안내문을 돌렸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아마 지역의 시민 단체 회원이신 분들도 계실 테고 아직 가입을 안 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지역의 단체에도 가입을 해주시고 평화박물관에도 관심을 좀 가져주십사하는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민주주의에 만들어나가는데 공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지갑을 여는 데부터 시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관심을 가져주십사 하는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올해가 광주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광주30주년 무엇을 할 것인가 라고 적었습니다.

올해가 광주 30주년이기도 하지만 뭔가 걸리는 해가 많죠. 사무처장님께서 그렇게 소개해주셨습니다만 한국현대사가 격동의 현대사였습니다. 이상하게 10년 단위로 큰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0”자 들어가는 해에 1920년에 10년 지난 다음에는 어떤 일이 있었냐하면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됐습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지금은 이상해졌죠. 좀이 아니라 많이 이상해 졌습니다.

1930년대 나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친일이라는 비판을 마땅히 받아야겠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일단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간이 1920년대에 있었고 그 다음 1930년하고 1940년은 아주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1950년에 가서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졌죠. 한국전쟁이 터졌습니다. 5000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1960년 딱 중간이 되는 얼마 전에 기념식이 있었죠. 4월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뼈와 살이 되는 단계였고, 해방이후에 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선언하게 된 계기였다고 생각합니다.

1970년대는 전태일 열사가 분신을 했죠. 한국사회에서 노동문제가 대두가 됐죠. 1980년대 5월 광주가 있었습니다. 저는 광주에서부터 우리의 한 시대가 새롭게 시작됩니다. 2009년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시고 김대중 대통령 돌아가시면서 민주화운동 시대가 끝났다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2000년대는 6.15 남북 공동성명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우리가 기억해야할 큰 사건들이 거의 대부분 “0”자 들어가는 해에 일어났습니다. 10년마다 역사가 크게 요동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 흥미 있는 건 우리가 9자 들어가는 해에는 역사적인 인문들이 많이 돌아가셨어요. 30년 단위였습니다. 우연의 일치인데요.

2009년 노무현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두 분을 떠나보냈죠. 거기서부터 30년 전에는 누가 죽었습니까. 1979년에 박정희가 죽었습니다. 1949년에는 백범 김구선생님이 세상을 떴죠. 1919년에는 3.1운동이 누구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것입니까. 고종황제가 세상을 떴습니다. 30년마다 고종, 김구, 박정희, 노무현, 김대중 굉장히 굵직굵직한 인문들이죠. 그냥 굵직굵직한 인물들이 아니라, 고종은 조선의 전통적인 왕족을 상징하고 백범선생은 독립운동은 상징하죠. 박정희는 군사독재와 경제발전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은 민주화를 상징하죠.

한국현대사 100년은 쉽게 요약하면 독립운동을 거쳐서 군사독재를 거치고 민주화를 했다, 아마 흔히 하는 말로 아홉수란 말을 하는데 역사에도 아홉수가 있는 모양인데 우연의 일치 치고는 참 재밌는 우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너무 빨리 흘렀어요.

역사학자인 저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역사적인 변화가 아주 컸습니다. 유럽은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갈 때 마녀사냥이 있었죠. 그 마녀사냥을 역사학자들이 뭐라고 생각했냐하면, 그게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이었죠. 마녀사냥이 왜 일어났느냐, 너무 빠른 사회변동을 당시 사람들이 감당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볼 때는 거의 변화가 없을 정도로 아주 밋밋하게 역사가 흘렀다 싶을 정도거든요, 현대 역사가 흐른 것에 비해서는. 그런데 그게 감당하기 힘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80년대, 우리나라 20세기에 들어서 보면 100년의 역사하고 어마어마한 속도감으로 흐른거죠.

영국에서요. 런던이 인구 백만의 도시에서 인구 구백만의 도시로 성장하는 데 사백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얼마나 걸렸냐하면 사십년 동안 일어났어요. 그러니까 역사의 진행속도라는 게 어마어마하게 빠릅니다. 그 빠른 와중에 우리가 너무나 큰 사건들을 제대로 감당하고 견뎌내기 힘들겠죠. 그런 역사가 지금 되어왔다, 그런 말씀을 드릴 수 있겠고요.

그 중에서도 우리가 특히 광주를 보게 되면, 왜 광주의 그 사건이 우리의 역사에  흐름 속에서 일어났는가, 우리가 해방을 할 때 불행하게도 우리의 손으로 해방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민족이 우리 손으로 해방을 못 하다보니까 우리민족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가 원래 원하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못할 거란 것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느끼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불행한 일은 바로 우리민족의 분단을 불러왔습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요. 1945년에 해방이 됐을 때, 2차 대전이 끝났을 무렵에 지구상에 나라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한 4,50개, 그런데 지금은 그게 수백 개 되죠. 그 나라들은 대부분 식민지에서 독립을 했는데, 제국주의 식민지 안에서 새로 정부를 구성하고 나라를 새롭게 건설해 나가는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했죠.

그런데 딱 두 나라, 두 나라에서 제국주의의 식민집권자들이 역사의 리더십을 장악했습니다. 그 중에 한 나라는 지금 없어졌어요. 어디냐 하면 남베트남, 딱하나 남은 나라, 그게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나라,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제국주의의 통치권자들이 새로운 세계에서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 우위를 장악한 나라, 그리고 동족과 전쟁을 겪은 나라, 그 나라에서 겪는 특수성이 굉장히 많이 변하게 했죠.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것들이 대한민국에만 있는 일입니다. 그 점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큰 특징은 뭐냐, 분단이라는 것, 분단은 결과물인 것이고 친일파문제를 다루는 당국자들이 남쪽에서, 천안함은 누가 했고 반북세력의 지도세력이 장악을 했다, 우리는 친일파 청산을 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아 그냥 친일파청산을 시켜야겠다’ 라고 말하는 건 저는 너무 밋밋한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게 어떻게 보면 역사의 왜곡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친일파 민족 반역자들을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민족적 양심은 버린 거죠. 1948년도에 정부가 수립됐잖아요. 그런데 1949년에 큰 일이 일어납니다. 어떤 일들이 일어나냐, 남조선 특수사건 이라고 합니다. 국회에서 반민법, 반민족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자고 주장했었던 젊은 위원들이 남로당의 간첩, 프락치라고 악질경찰에게 잡혀갑니다.

그리고 또 반민특위를 습격합니다. 반민특위가 어떤 곳입니까. NGO일까요? 시민단체예요? 정부기구입니다. 헌법에 의해서 반민법을 만들었고 그 반민법에 의거해서 세운 정부기구예요. 그런데 이 정부기구를 역시 정부기구인 경찰이 공격을 해서 다 때려 부수고 사람들을 수감하고, 그것을 대통령이 경찰의 손을 들어줬죠. 그래서 반민족행위자 처벌이 흐지부지 돼버리죠. 그리고 2주 후에 백범 김구선생이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돌아가시게 되죠.

그런데 이 세 가지 사건, 남로당 프락치사건, 반민특위 습격, 백범김구의 사망이 역사책에 따로따로 나옵니다. 그러나 저건 저 세 가지 사건이 분리된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친일파 민족 반역자들이 민족적 양심을 가진 우파 인물을 처단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우파들만이 만들어집니다. 우파라고 해서 다 친일파 민족 반역자가 아닌데, 지금은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민족적 양심을 가진 우파들도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좌파나 중도파는 다 뺐습니다. 어떻게든 단독정부 수립을 막아야 한다, 이게 좌파와 중도파의 기본 성격이었다면 우파들 중에 이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자, 분단되는 현실을 받아들이자,  국과 소련이 남북을 각각 지배하고 있는데 거기서 어떻게 통일정부가 가능하겠느냐, 미국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정부를 세울 것이고, 북쪽은 소련이 원하는 방식의 정부를 세울 것이다, 그게 현실이다, 그러나 그 정부를 세우는 데 우리가 들어가서 그 정부가 서로 대립하지 않게 한 후에 미국과 소련을 내보내고 우리 민족끼리 통일하자, 이런 성격의 구성원들이 분단정부로서의 대한민국 정부의 수뇌들입니다.

분명히 있을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생각이 불행하게도 친일파가 함께하면서 못했죠. 그래서 대한민국이 처음 세울 때부터 국가의 성격이 이렇지 않았습니다. 오늘 집에 가면은 꼭 제헌헌법을 읽어보세요. 헌법 딱딱하고 재미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뉴라이트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죠. 국가정체성이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진짜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알려면 제헌헌법을 읽어야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제헌헌법은 우리가 지켜야 할 대한민국, 우리가 대한민국을 만들 때 대한민국이 국민들에게 어떤 모습을 할 것인가를 담고 있습니다. 그 제헌헌법의 내용을 보면 까무러쳐요. 지금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강령보다 훨씬 급진적입니다. 진보신당이 요즘도 그런 이야기를 하나요? 헌법재판, 중요 산업의 국유화 등. 그런데 제헌헌법의 경제 관련 조항을 보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제헌헌법에 의하면 부동산 투기는 사유재산의 반환에 해당됩니다. 다른분야가 또 기대되시죠? 노동 분야에 우리는 노동 3권이 있죠.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노동자들은 떼거지로 모일 수 있는, 떼거지로 우길 수 있는, 떼거지로 나설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거죠.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여러 집단 중에서 오직 노동자에게만 부여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제헌헌법은 그 노동 3권 중에 기본적이면서도 지금입장에서 보면 아주 희한한 기본권을 줬습니다. 이익분배균점권. 기업에 이익이 발생했을 때 노동자들이 그 이익을 분배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임금을 받습니다. 노동력을 파는 대가죠. 그리고 그 기업에서 이익이 발생하면 누구껍니까? 주주들꺼죠. 주주들에게 주고 나서 노동자들에게 보너스를 주면은 ‘아이고 감사합니다’ 죠.

그런데 제헌헌법 18조에서는 이 규정이 있습니다. 이익분배균점권. 이게 정상적인 자본주의가 될까요? 그 당시에, 제헌헌법을 만들 당시에 중요산업국유화가 헌법에 보장돼 있던 나라는 딱하나 소련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평민주의를 따르던 중국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중요산업국유화를 보장을 했어요. 이게 굉장히 급진적인 내용이죠. 하지만 해방 직후를 생각해보면 별로 급진적인 얘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해방 이전에 중요산업은 일본 제국주의가 갖고 있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해방 전에 갖고 있던 자본이 한국 전체 자본의 94%. 그 94% 안에 웬만한 산업 다 포함되죠. 웬만한 산업은 다 일본인들이 갖고 있습니다. 자, 그것을 조선사람 전체의 것으로 인정해서 국유화를 하는 게 낫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누구에게 떼어주는 게 낫겠습니까. 당연히 우리국민 절대다수가 중요산업국유화를 지지했습니다. 농지개혁. 농지 누구 껍니까. 지주 꺼죠. 이것을 뺏어서 농민들에게 강제로 나눠줍니다. 지주의 사적재산권을 국가권력을 통해 침해하는 거죠.

그래서 그 토지를 농민에게 나눠주는 거죠. 그런데 해방 당시 조선팔도에서 제일 잘 나가던 지주가 인촌 김성수였는데, 인촌 김성수도 농지개혁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굉장히 큰 손해가 옴에도 불구하고 민주개혁을 해야 한다고 본 거죠. 지금 동아일보가 김성수를 이어받아서 뭘 한다고 하지만 지금 동아일보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태도죠.

김성수에 관해 저는 지금 조선일보 동아일보하고 격이 달랐다고 봅니다. 농지개혁을 반대하지 않았지만 토지개혁은 반대했죠. 모든 토지를 개혁한다, 그래서 분배한다, 그건 좀 심하다, 그래서 이 개혁은 방법론에서 틀렸습니다.

공산당, 북진파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했는데, 이건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했죠. 그래도 어쨌거나 농지개혁을 안 했으면 한국 현대사에 대한민국 없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 농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모릅니다. 인민군은 토지개혁을 했죠. 농민들 반응이 어땠습니까. 농지개혁을 안 한 상태에서 토지개혁을 했더라면 열광했을 겁니다. 그러나 일단 농지개혁을 했는데, 막상 또 니꺼라고 해주겠다, 이건 뭐 별로 뜨뜻미지근했던 거죠. 지금하고 다릅니다.

지금은 어때요. 대한민국에서 초 중 고등학교 나오고 군대갔다오고, 올림픽, 월드컵 때 “대한민국”부르면서 금메달 따면 좋아하고... 그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쉴 사이 없이 우리가 몇 십년 동안 알게 모르게 갖고 있는 거죠.  

1950년대 농민들은 어땠을 것 같아요. 무학이 80%, 문맹이 90%였습니다. 애국가? 그런 거 몰라요. 우리는 만날 방송에서 아침저녁으로 나오고 학교에서 부르고 했으니까 알지, 대한민국이란 나라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땅을 준다는데 지지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농지개혁 없이 한국전쟁이 일어났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지만 아주 중요하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우리헌법이 농지개혁까지 지향했다, 그리고 또 하나, 반민특위를 설치한 것,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청산하려고, 이게 우리 헌법의 약속이었습니다. 이게 뭐냐, 적어도 이런 바람을 채워야만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우리 임시정부에 대해서 역사책에 좀 나오죠? 그런데 저는 우리 교과서에서 임시정부를 대단히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봅니다. 몇 년도에 어디서 세웠고, 누가 세웠고, 어디어디로 도망 다녔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글쎄요... 저는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걸 가르쳐야 한다고 봅니다.

임시정부가 독립이 되면 어떤 나라를 세우려고 했는가, 그걸 가르쳐야 하는데 그걸 안 가르치고 있는 거죠. 그러나 그 나라는 1988년 대한민국 헌법에 나온 나라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죠. 적어도 무상교육, 무상치료, 파업의 자유 이런 조항에서 말이죠. 그런데 무상교육 무상치료는 빠졌습니다, 제헌헌법으로. 파업의 자유도 빠졌습니다. 중요사업의 국유화보다는 무상교육 무상치료 하는 게 더 오래 걸렸습니다.

우리 제헌헌법이 이런 내용입니다. 헌법을 만들었으면 헌법 해설서가 있을 거 아닙니까. 그 헌법 해설서 중에 헌법해의 라고 있습니다. 유진오박사가 쓴 책인데 헌법에 기초해서 그 국회에서 ‘아무개 안’ 해서 헌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초대 법제처장이었습니다. 그 분이 쓴 헌법 해설서는 헌법의 초안을 잡은 사람의 해설서입니다. 그 해설서를 보면 기가 막힌 내용들이 나옵니다. 뭐라고 하냐면 대한민국은 경제체제에 있어서 개인본위에 입각한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폐지하고 OO주의적 균등주의를 위하고자 하는 경제제도를 채택했다, 노동자의 이익 분배균점권을 설명하면서 자본주의체제에서는 불가능하다, 한국경제에선 자본주의가 아니다. 한국은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그런 체제이다. 이게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헌법정신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처음에는 경찰이, 나중에는 군이 한국사회를 지배하게 됐죠. 군이 한국사회에 주요부분으로 등장했고, 4.19를 거치면서 군과 경찰이 격돌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4.19 후에...?? 집권하면서.

저는 역사가 발전할수록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서 박정희씨가 강력한 독재를 실시했죠. 그래서 그 독재에 저항도 했지만 많이 밀리기도 했습니다. 1979년 박정희가 죽던 그해 유신 말기 79년 4월 1학기 서울에서 학생대모가 거의 없었습니다. 1학기 내내 서울에선 대모가 한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유신말기가 되면 대모도 해체가 되죠. 5명이 한 팀이 돼서 그런데 왜 없어졌냐. 5명 한 팀을 짜기 어려울 정도로 79년 8월 7일인가 8일 농성을 시작했죠.

그 농성이 시작되면서 급격하게 발전하기 시작하죠. 불과 20일만에 박정희가 먼저 총 맞았죠. 부산 마산에서 부마항쟁이 일어납니다. 부산 마산은 상황이 어땠냐면은 5년 동안 데모가 한건도 없었습니다. 제가 작년 부마항쟁을 가지고 논문을 쓰려고 학생 운동 하던 사람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했는데 어떤 말을 하냐면 그때 너무 데모가 없어서 자기들끼리 어떤 소문이 서울에서 숙명여대에서 소포를 받았다는 소문이 있었데요.

데모에 대한 부끄러움 창피함이 있었던 거겠죠. 5년 만에 대모가 일어났는데 그날 저녁에 시민 5만명이 모였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김영삼이 부산출신이죠. 부산 마산 출신인데 유신을 비판하고 김일성하고 만날 용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일이 있고 불과 20일 만에 총을 맞고 죽게 되는 겁니다. 당시 중앙정부도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중앙정보부가 보통이 아니죠. 제가 1년 반 동안 취직을 했었습니다. 보통기관 아닙니다. 박정희는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김재규는 박정희와 친형제와 같은 사람입니다. 박정희가 끌어줘서 정권의 1인자 까지 오게 됩니다. 하지만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쏩니다.

김재규의 생각에 박정희가 죽으면 유신체제가 무너지리라 생각했던 겁니다. 김재규도 그 이후에 대책이 없었고 전두환이 일어나서 정권을 잡아 버렸습니다. 유신체제의 권력순위 1,2,3,4 번 그때 검찰이 힘이 없었어요. 그때 검찰은 중앙정보부에 힘을 못 썼어요. 그 다음번 권력이 육군 참모총장이었어요. 그 다음이 보완 사령부.

김재규는 박정희를 쏨으로서 유열사태를 막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한테 머리를 갔다 바친거죠. 수천명 수백명이 피를 흘리는 것보다 우리 총리님이 피를 흘리는 것이 낫겠다. 그러나 어떻게 됐습니까? 대규모 유열사태를 막지 못했죠. 시간이 흐리고 공간이 변해서 광주에서 터집니다.

공수 부대를 투입을 해서 시민단체를 진압을 했죠. 광주는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입니다. 공수부대를 투입 시켰는데 전두환 일당도 자기들 나름대로 부마사태에 대한 교훈을 이렇게 내렸습니다. 얘들이 진작에 공수부대를 투입 했으면 한 시간도 안 되서 진압하는 건데 우왕좌왕 하다가 5만 명 모이게 했다. 앞으로 시위가 있으면 공수부대를 투입해서 밟아버리자. 이게 걔네의 교훈이예요.

초장에 확실히 진압을 해서 시민을 아주 쉽게 진압시키자 이것이 공수부대의 목표이고 교훈이였습니다. 광주에서는 이게 이상하게 돌아간 거죠. 광주시민들이 김대중이 있었기 때문에 수십년 만에 화풀이를 해보나 김대중이 체포됐으니 거기에 대한 분노, 시민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공수부대가 어떤 작전을 썼냐면 데모자를 끝까지 추적하고 마지막에 한 놈을 체포한다 이였습니다.  

처음에는 시민들이 겁에 질렸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공수부대가 분산되서 한명이니까 동네 청년들이 연탄집게, 삽꽹이를 들고 나가서 찍는 겁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공수부대가 진압했는데 광주에서는 분노하는 시민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겁니다. 공수부대 피해가 엄청 난겁니다. 공수부대가 당황하고 몰리기 시작합니다. 결국은 도청으로 모이기 시작합니다. 우리 운동사에서 보면요. 열사는 이름을 기억할 수 없도록 합니다.

전 세계 민주화 운동 사회에서 열사가 우리나라처럼 많은 나라는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그 만큼 폭력을 안 쓴다는 말입니다. 아무래도 한국전쟁 때 된통 당한 그 후유증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끽해서 식칼 들고 나오죠. 미국은 어때요 고등학생들이 기관총 쏩니다. 폭력의 정도가 비교가 안 됩니다.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 미국이 우리에게 언제 왔지. 미국이 우리에게 어떤 짓을 했지. 미국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 일까 인지에 대한 아주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봅니다. 대한민국은 반미가 일어나지 않는 유일한 국가죠. 빈라덴이 나오기 전까지. 미국 얘기는 이따가 기회가 되면 다시 하기로 하죠. 오후 3시면 도청 앞 분수대에 모여서 그날도 한 3만명 모였어요. 광주에서 3만명 모이면 어마어마하게 모인겁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계엄군이 기관총과 탱크로 무장을 하고 쳐들어옵니다. 막아낼수 있겠습니까? 광주는 고사하고 도청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싸워봐야 실패를 압니까. 싸워보지 않아도 결말이 뻔한 싸움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광주를 지킬 수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런 바보는 아니였을겁니다. 도청을 김두환에게 내주는건 죽은 사람들은 뭐가 됩니까.

여러분 만약에 전두환이 텅빈 도청에 들어와서 광주를 장악했다면 지금 우리는 구지 광주 30주년을 여기서 진행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당시 죽은 사람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200여명 정부 발표에서 크게 어긋나지도 않는 숫자였던 거 같아요. 제주 4.3사건 당시 제주 360만 명이 죽었습니다. 하루 저녁에 광주만큼 사람이 죽어간 동네가 한둘이 아닙니다. 제주도 큰 사건이지만 광주하고 의미가 다릅니다. 광주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중 하나가 아니라 역사를 만든 사건입니다. 광주에서 새로운 역사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광주에서 그날 도청에 남았던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 지금 천안함 사건 때문에 우리는 당신들을 꼭 기억하겠습니다. 그런 말이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광주 때도 그런 말이 나왔습니다. 화려한 휴가의 마지막 피날레. 이요원씨가 마이크를 잡고 “광주 시민 여러분,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우리를 기억해 주십시오.” 기억해 달라는 건 뭐예요. 왜 우리를 기억해 달라고 했을까요. 처음에 사람들이 공수부대가 진압해 들어왔을 때 너무 너무 무서웠어요. 공수부대 에 머리가 깨지고 피범벅이 되고 그런걸 보고 나니까 실감이 안나고 초월을 하는거예요.

그 때 시민군으로 도청에서 잡혔던 사람 중에 친하게 지내는 형님이 있는데, 그 때 어머니한테 큰 절하고 나니까 어머니가 막는데, 자기는 가겠다고. 결국 어머니가 지고 밥이라도 한 술 먹고 가라고 하셨었다더군요. 도청에 남은 사람들 중엔 우리가 죽고 나면 계엄군이 우리 시체를 제대로 건사나 해 주겠느냐, 하며 목욕탕에 다녀와서 깨끗하게 속옷 갈아입고 그 밤에 총을 들고 도청에 남아있던거죠. 그 때 이요원씨가 마이크를 잡고 기억해달라고 하는 거죠. 그런데 그 때 계엄군도 마이크를 잡죠.

“광주 시민 여러분, 광주 시민 여러분, 도청이 폭도들에게 장악되었습니다. 시민 여러분 지금 모두 꼼짝 말고 계십시오.” 그 때 광주시민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다 흩어져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들이 모두 쿨쿨 잠을 자고 있었을까요? 아마 뜬 눈으로 밤을 지샜을 겁니다. 그리고 총소리가 나다가 멎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았죠.

저는 아마도 5월 17일 그 새벽이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긴 새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광주 시민들에게. 그리고 그 새벽이 끝나고 어김없이 해는 떠올랐습니다. 방송에서 뭐라고 얘기했을까요. “국민여러분, 이제 광주는 평온해졌습니다.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방송은 그렇게 떠들어댔죠. 저는 그 때가 우리 역사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게 모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천안함이 그렇습니다.

저는 그런 아쉬움이 있기 때문에 우리 역사가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아쉬움이 없었다면, 그날 그 도청의 그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역사가 쓰일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날 이후에도 이백명, 삼백명이 죽어간 사건은 이루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을겁니다. 수많은 사건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는 광주가 새 역사를 열 수 있었던 것은 그 아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은 자들에 대한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 있었기 때문이죠. 80년대 운동은 70년대 운동과 좀 달랐습니다. 그 때 전 대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저 또한 그것을 온몸으로 겪었습니다. 역사에서 보면 기원전과 기원후가 다르듯이, 광주 이전과 광주 이후가 다른 것 같습니다. 그 전에는 운동이 상당히 낭만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박정희 때하고 광주 이전에는 죽기살기로 싸우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광주 이후에는 우리가 죽기살기로 싸웠었죠. 그리고 우선 전두환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죠. 박정희한테는 그 당시 반유신체제 인사들도 한수 접고 들어가는 그런 기술이 있었습니다. 우선 박정희가 좀 전두환에 비해서는 무섭게 생겼잖아요.

그리고 전태일 있죠? 전태일이 죽기 한 일 년 전쯤에 박정희에게 탄원서를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 보면 뭐라고 돼 있냐면, 각하는 우리들의 생명의 근원이요, 원천입니다. 뭐 이런 부분이 있어요. 각하라고 깍듯이 부릅니다. 그러나 전두환은 처음 시작부터 ‘찢어죽이자’로 시작했어요. 이게 뭐냐면 5.16은 한명이 죽긴 했지만 사실상은 무혈혁명이었지만 전두환은 그게 아니었죠. 김남주 시인이 그랬죠. 양심 있는 사람이 가야 할 곳은 정권일까 감옥일까 무덤일까.

여러분 혹시 강풀의 26년 이라는 만화 보셨습니까? 거기 보면 기가 막힌 말이 하나 나옵니다. 저는 그 만화 자체도 아주 놀라웠지만, 정말 마음에 남는 대사가 뭐였냐면, 그 구조가 전두환한테 보복을 하는 겁니다. 5.18 때 가족을 잃은 유가족, 그리고 5.18 때 계엄군으로 투입돼서 학살을 했던 사람이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적어도 전두환에게 가서 왜 그랬느냐고 묻는 거죠. 광주에 투입이 돼서 인생이 망가진 사람이, 왜 나를 광주에 투입했느냐고 물을 권리가 있다는 거죠. 우리 사회가 처벌하지 못한 것에 대해 보복을 하는 거죠. 우리가 보복하는 사람을 보통 막지 않습니까? 보복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

그래서 사회에서 처벌을 하죠. 이러한 처벌이 실패한 곳에서 보복을 어떻게 말릴 것인가 하는 문제.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전두환한테 보복한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살았다는 거죠. 그런데 그 만화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게 뭐냐 하면, 전두환을 저격하는 계획을 세우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게 바로 국가대표 사격선수입니다. 어머니가 낳자마자 5.18 때 희생됐어요. 이 아이를 아버지가 혼자 키웠는데, 이 아버지는 광주의 충격 때문에 실어증에 걸렸어요. 그래서 이 딸이 스물 여섯 살이 되도록 아버지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근데 그 아버지가 죽기 직전에 딸이 거사를 앞두고 있는 걸 어렴풋이 눈치 채고 말 한마디를 하고 죽습니다. 딸로써는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 목소리를 들었는데, 그 이야기가 뭐였냐면 “미진아, 너는 네 인생을 살아라.”였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은 광주에서 죽었다는 겁니다. 그 죽은 사람의 인생을 살았던 거죠.

노무현 대통령이 이런 얘길 했습니다. 저는 노무현 대통령을 광주의 아들이라고 생각해요. 노무현 대통령이 봉화사람인데 왜 광주의 아들이냐? 광주와 아무 연관이 없는데도 80년대 광주의 아들이 된 사람이 많아요. 광주 때문에 인생이 달라진 사람들입니다. 광주는 수없이 많은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 냈고 그 사람들은 주체적으로 스스로 광주의 자식들이 되었습니다. 80년대에 전두환에게 대들면, 감옥에 갔습니다. 감옥만 갔나요? 정보부, 경찰서 등등 다니면서 엄청 두들겨 맞았죠. 죽도록 맞고 고문당하고 그랬습니다.

학교 짤리고 감옥가고, 집안 풍비박산나고, 아버지는 직장 짤리고... 엄청난 불이익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데 전두환에게 맞서싸운 사람이 수천 수만명이 나오죠. 그 사람들이 바보였나요? 그런데도 싸웠습니다. 그 불이익을 생각하더라도, 그 불이익을 생각하더라도 광주를 떠올리면 계산이 안되는겁니다. 죽는 사람들도 있는데... 계산을 못하는 사람을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바보라고 부르죠. 광주는 수많은 바보를 낳았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보 노무현이죠. 노무현이 특별히 기억되는 이유가 뭘까요? 좀 더 나이가 많았고, 바보가 될 때 이미 변호사였고, 다른동네 사람이었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끝까지 바보였다는 거죠. 바보들이 다 계산하는 법을 배우고 나서도,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더 이상 바보가 아니었어도, 노무현은 비교적, 적어도 대통령 될 때까지는 -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 적어도 대통령 될 때까지는 충실하게 바보였죠.

운동을 떠날 때 눈물을 흘리면서 고민을 한 끝에 운동을 떠난거예요. 80년대는 그랬어요.
도청 진압하고 난 다음에 시신들.. ?? 저런 게 절망입니다. 처절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싸우면서 매번 이기겠습니까. 수많은 광주의 자식들, 바보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이 강고한 군사독재 정권이 80년대 이후로 탄력이 정권이 교체됩니다.
김대중이 정권을 잡고 그 이후 노무현이 대통령이 됩니다. 김대중 당선은 참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노무현 당선은 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김대중은 비주류였지만 대통령 후보만 26년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노무현은 어땠습니까? 한국의 기득권층에서 봤을 때 요즘 아이들말로 듣보잡이죠. 듣보잡 아십니까? 듣도 보도 못한 잡놈.

전통적인 속된 이야기로 말하자면 어디서 굴러들어온 개뼈다귀인지 모르죠. 이렇게 받아들여진 사람이 치고 올라온겁니다. 고졸 학력에... 이런 사람이 대통령 선거에 의해서, 그것도 재야에서부터 올라가서 대통령이 될 수 있는가가 불확실했습니다. 한국이 얼마나 민주화 되었는가?라고 묻는다면 노무현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민주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일이죠. 그러나 지금은 조금 더 나아가서 얼마나 민주화되지 않았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 노무현이 바위 위에서 뛰어내려야 할 만큼 민주화 되지 않았다는 냉혹한 현실이 있죠.

그럼 이 광주가 낳은 중요한 성취와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광주의 아들이 바위 위에서 뛰어내려야 할 만큼 민주화되지 않은 정치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말 그 사람들이 열심히 싸울 수 있던 그 힘, 광주에서 도청에 있던 그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싸울 수 있던 거죠. 그러나 우리가 지금 민주화되어가면서 그 흔적들을 잊어버리고 시작한 겁니다. 민주화가 되고나서, “아 이제 됐다, 많이 됐다”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됐죠. 자기들만 민주화되고 떨어져나갔죠.

재야운동은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으로 또 나뉘었고 민중운동은 주류운동과 비주류운동으로 또 나뉘었죠. 그게 우리가 광주를 잊어버리는 과정이었습니다. 우리 가슴속에 들어왔던 광주가 우리로부터 멀어져 간, 광주가 우리로부터 멀어졌는지 우리가 광주로부터 멀어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참 열심히 싸웠는데, 열심히 싸워서 불가능할 것 같던 민주화를 이뤄냈습니다. 동서냉전이 끝나기 이전에 반쪽짜리에서 민주화를 이뤘는데. 김대중 대통령, 진짜 밑바닥에서 올라와서 대통령됐죠. 노무현은 더하죠? 그런 변화를 우리가 끌어낸 겁니다. 그러나 그 변화에 우리 스스로 너무 도취되지 않았나. 우리는 민주화됐다고 생각하는 사이에 비정규직이 생겼습니다. 여러분 비정규직이란 말, 기억을 더듬어 보십시오. 물론 60년대에 비정규직이란 말 있었죠.

여러분, 민주화돼서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나요? 어떠세요? 살림살이 안 나아졌습니다.
그런데 87,88년도, 민주화 되어서 살림살이 좀 나아졌습니다. 이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내수시장이 열리고, 이 내수시장이 열리면서 우리가 박정희를 비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생깁니다. 박정희는 독재하면서 경제발전을 할래? 민주주의하면서 깡통찰래? 라고 우리에게 물었지만, 우리는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달성했습니다.

그것뿐인가요? 민주화되어서 우리 살림살이가 나아진 게? 평균수명 많이 늘었습니다. 80년대 후반만 해도 남자 평균 수명, 63,4세 밖에 안됐어요. 근데 지금어때요? 그냥 80살까지 올라갔죠. ?? 노동자들이 명예퇴직이라는 게 있고, 우리 80년대 이미 영아사망률은 낮았어요. 노동자들이 명예퇴직을 하게 됐고, 근로환경이 좋아졌고, 노동시간도 많이 단축이 됐어요. 지금 다시 늘어났지만. 임금이 올랐기 때문에 노동시간이 단축됐죠. 장시간 노동을 안 하면서 잔업도 안해도 되고, 그 덕에 사람들이 7,8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 제일비싼 영화가 육십만 봅니다. 지금 영화 천이백 천삼백만 보죠. 육십만 보던 나라에서 천이백만 보는데, 인구가 뭐 이십배 늘었습니까? 아니지않습니까. 노동자가 극장에 갈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나마. 그런데 딱 거기까지.

92년 93년, 인구모자라니까 비정규직 생기잖아요. 우린 몰랐었습니다. 우린 민주화 되어 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신자유주의 국제화 되기 위해서는 부분적으로 받아야 한다. 여러분 이명박이 2002년 이회창이 얻었던 표보다 많이 얻지 못했습니다. 민주화 됐으면 뭔가 달라져도 달라졌어야 됩니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 조짐이 보인다. 이런 맛이 있어야 하는데 없습니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년만 더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우리 대중들이 믿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노무현 대통령이 15개월 만에 바위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김주일이 죽었을 때. 김주일이 누군지 아십니까 한진중공업 노조 위원장입니다. 높이 40m되는 고공 크레인에 올라가서 128일을 농성을 했습니다. 혼자 그러다 129일째 되던 날 그 높은 크레인에서 목을 맸습니다. 김주일이 죽었을 때 노무현 대통령이 이제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지는 않는다. 저는 그때 그 말을 듣고 왜 저런말을 할까 미웠습니다. 싫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죽고 난 다음에 김진숙이라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노동권자 노무현의 추도사라고 해야 되나요. 그 글이 지금까지 노무현의 추도사 중에 가장 가슴 뭉클한 추도사였습니다. 그 글을 읽고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노무현이 김주일의 변호사이고 김진숙의 변호사였던 겁니다. 변호하던 사람이 노무현이 노동변호사, 인권변호사였습니다.

이제 자기가 대통령이 되고 이제 민주화 된다 했는데 자기가 변호 했던 사람이 죽어서 이제 죽음이 투쟁의 수단은 지나갔다고 참 모진 말입니다. 고공농성이 죽는 거 빼놓고 다해 본 사람들이 하는 겁니다. 그리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거기서 죽는 겁니다.

노무현도 죽음을 투쟁의 수단으로 뛰어내렸습니까? 아니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겠죠. 저는 광주 30년을 지내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역사를 보십시오.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 시작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싹쓸이 된 상황에서 전쟁이 끝나고 만 7년 지난 후에 4월 혁명을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가 광주에서 짓밟히고 만 7년 후에 6월 항쟁을 만들어 냈죠. 이렇게 우리가 승리의 기록을 만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승리의 기록을 만들면서 우리가 놓친 것들, 비정규직을 놓쳤습니다. 비정규직을 놓치면서 우리의 민주화운동의 기반이 그만큼 축소되었습니다. 민주주의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 사회의 자원을 누구를 위하여 쓸 것인가? 삽질해서 토건업자들의 주머니에 밀어 줄 것이냐? 무상급식을 통해 밥 못먹는 아이들을 위해 밥을 줄 것이냐? 이런 걸 정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민주주의를 잘 몰랐지만, 광주에서 민주주의를 외치고 6월 항쟁 때 민주주의를 외치고 했지 않습니까?

우리가 실현해야 할 민주주의가 그런 민주주의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만 민주화되고 말았다구요. 누구는 장관이 되고 누구는 대통령이 되고 누구는 총리가 되고. 그러면서 세상이 많이 민주화되었다고 생각했다가, 보니까 그거해서 어? 하고 놓치잖아요. 그러면서 우리가 민주화운동의 큰 세력을 유지해야 하는 부분인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 갈리고 민중운동이 또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리고 비정규직은 쪼개지고. 비정규직의 싸움에서 어느 날 투쟁의 현장에서 참 가슴아팠던 게, 모닝이라는 경차 만드는 회사에 갔는데, 그 회사가 한국 자본주의의 꿈의 궁전입니다. 왜냐? 생산직 천오백 명 전원이 비정규직입니다. 기가 막히죠. 그러니까 한국 자본가들의 모델과 같았죠. 이렇게 전원이 비정규직이니까 시급이 얼마인 줄 아세요?

그 때 최저임금이 3,770원 할 때인데, 그보다 20원 많은 3,790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싸우고 있는데, 그 싸움에 연대하러 오는 사람이 누구냐하면 시급 3,780원을 받는 아주머니들이 연대합니다. 이것이 한국 시민사회가 보여줄 수 있는 비정규직 연대인 것을 보고 전 한국 민주주의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디서부터 다시 출발해야할까? 정말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합니다. 광주의 정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도 광주로부터 30년 살아보니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역사에서 길이 복잡했던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길이 복잡한 게 아니라 우리의 머리가 복잡한 것이죠. 광주가 만들어 놓은 수 많은 광주의 자식들, 새로운 DNA가 우리에게 심어진 것처럼 천안함의 슬픔을 가진 자들이 역사 앞에 섰을 때, 머릿속이 복잡할까. 전혀 복잡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젠 새로운, 비정규직 등의 문제들에서 우리의 시각을 갉아먹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나아가지 못하고 무너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역주행이라고 할 지 몰라요. 그런데 이미 고통을 받기 시작한 비정규직들에게는 그게 역주행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 그들에게 가서 역주행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이 우리를 지지해줄까요? 정말 우리가 광주를 되새기면서 광주에서부터 시작해야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광주가 만들어놓은 시대는 끝났다. 이겨도 봤고, 져도 봤고, 게다가 그 주역, 중심에 있던 노무현도 죽었고. 이제 다시 우리가 촛불세대와 함께 시작해야합니다. 촛불세대가 어떻게 비정규직들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저는 잘은 모르겠어요. 아직 어떻게 하는 게 맞다... 길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방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가는가? 우리를 그렇게 가게 하는 것, 역사 속에서 더 험난했던 시대에 우리를 밀고 나가게 했던 그 정신, 그게 바로 30년 전의 5월 광주가 지금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마치겠습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