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을 사람의 만남이 아름다운 도시로,
열린시대 새 지방자치를 만들어갑니다.
지난 4월 30일 하나은행 대강당에서 있었던 대전민주주의학교 한홍구 교수님의 “대중문화와 민주주의” 강의 녹취록입니다. 냉철한 강의를 해주신 김창남 교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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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대전도 길이 막히는 것이 장난이 아니네요. 식사를 좀 하고 오느라고 늦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주제가 대중문화와 민주주의라고 되어있습니다.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 지금 우리 모두가 피부로 느끼듯이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가 됐다고 믿어왔는데 어느 순간 그게 아니였나보다 얘기를 하고 있는 상황인 것 같네요. 그래서 다시 한 번 민주주의라고 하는 문제를 얘기해보는 그 시점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대중문화라고 얘기하는 것은 민주주의 함께 성장하는 민주주의의 산물이 다라고 얘기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요즘 말하는데 근현대사들 대중문화를 얘기합니다. 그 사회를 지배하는 귀족들의 사회를 얘기 하죠. 정세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거죠. 계몽주의 사상이 등장하고 계몽주의 사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고 근대적 신문 형태로퍼트리고 새로운 문화의 공간이 생각나는 것이죠.
공적으로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공장이 생겨나게 되면서 근대사 시장이 되게 됩니다. 결국 그 새로운 계층이 사회를 주도하는 그게 바로 근대 사회고 브로주아라는 계급이죠. 이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서 중산층이라는 새로운 계층을 형성하게 되고 새로운 문화의 소비자가 되는 겁니다.
새로운 청중을 형성하게 되니까 예전의 예술가들이 새로운 중산층을 위해서 문화를 생산하게 되는 거죠. 우리가 음악가를 예를 들어보면 우리 음악사의 중요한 이름들 바하, 모짜르트, 베토벤 이 세 사람이 굉장히 중요한 사회적 변화를 대변하는 작곡가들입니다. 바하는 평생을 귀족들에게 소속돼서 월급을 받으며 음악을 작곡한 사람이에요.
수많은 작곡을 했는데 그게 먹고 사는 일이였기 때문입니다. 의무 판수를 채우기 위해 엄청 나게 작곡을 했죠. 봉건체제 속에서 바흐의 예가 예술의 생성방법이었다면, 모짜르트는 달랐어요. 이 사람은 새롭게 부상하는 부르주아의 성향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귀족들의 스폰서를 받지 않으면 먹고 살수 없었어요. 굉장히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몸은 봉건적인 문화예술 속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모차르트는 이 때문에 평생을 괴로워했던 사람이죠.
성격도 괴팍하고 세계관 자체가 안 맞아서 스폰서 받기가 힘들었던 사람입니다. 반면 베토벤은 그 새로운 계층이 어느 정도 형성된 다음에 살았던 사람이에요. 불과 모짜르트와 베토벤은 15살 차이밖에 안 납니다. 모짜르트가 일찍 죽었고 베토벤은 오래 살았기에 굉장히 긴 시간 격차를 두고 활동을 했습니다.
피아노 악보가 발간돼서 판매가 됩니다. 베토벤 시대에는 피아노 악보만 팔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시대에요. 그래서 베토벤은 굳이 모짜르트, 바하에 비해 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됐던 거죠. 그렇기 때문에 베토벤인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었고 이런 과정에서 생산과 소비층들이 변화해 가는 거죠. 근대 시민 사회가 등장하고 민주주의가 시작되는 거죠.
그 과정에서 새롭게 형성된 그 계층, 새로운 중산층이 대중문화를 만드는 새로운 주최가 된 거죠. 그렇게 새로운 시민사회 속에서 대중문화라고 하는 영역이 서서히 빠르게 발전을 해나가는데 19세기 후반이 되면 산업혁명과 함께 노동자 계층이 생겨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테크놀로지가 굉장히 빠르게 성장합니다. 또 한 번 문화적 변화가 생겨나죠. 산업화 시대의 대중문화는 상업적인 상품으로 거래되면서 돈을 벌기 위해 만들어 지는 성격으로 바뀌게 되는 거죠.
이때부터 미디어 자체가 대규모의 관중을 상대하고 엄청나게 커지다 보니 통제하고 견제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힘들이 작용하게 됩니다. 국가가 통제하려고 하거나 자본의 통제를 통해서 대중문화의 이윤을 높이려는 힘이 작용하면서 민주주의적 성격이 변화하게 된 이고 결국 민주적인 대중문화는 국가라는 것과 자본(시장)의 두 가지 힘에 영향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국가는 대중문화를 어떤 관계를 맺는가이죠. 우리가 흔히 이해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문제에 해당 됩니다. 국가 권력이 대중문화를 자신의 이해관계, 이념, 가치에 걸 맞는 것으로 만들고 하죠. 이런 표현의 자유문제에서 국가가 행사하는 권력 수단은 바로 검열이라고 하는 겁니다.
검열도 어느 사회에나 다 있었져. 다만 검열의 형식, 내용, 주체가 다른 것뿐이죠. 우리나라도 당연히 다양한 검열이 존재해왔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랜 군사독재를 겪었고, 전 세계적으로 검열 메커니즘을 경험했던 나라입니다. 검열만이 아니라 통제 방식은 제도적 개입을 통해서 방송위원회가 있죠.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통해서 통제하는 거죠.
최근 미디어법 개정을 통해서 새로운 채널을 만들려고 하죠. 국가의 대단히 중요한 통제방식입니다. “보수 언론 측에 주겠다” 하고서는 그냥 붙들고 있죠. 과거 군서 정권 시절의 다양한 실질적으로 대중문화 생산자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집어넣는다거나 보도지침 등을 통해서 미디어를 통제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국가 정책을 홍보하고 최근에 공익광고 형식으로 많은 얘기들을 듣다보면 개인적으로 공익 라디오를 들어 보니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 소통할 때 웃는 대한민국이 시작 됩니다” 라는 공익광고나 “청탁을 바꾸면 청렴이 됩니다.” 라는 광고를 들을 때 마다 짜증이 납니다. 이걸 들어야 하는 놈들이 누군데 하는 생각을 하죠.
어쨌든 국가는 다양한 매체나 정책을 통해서 통제하고 자기 영토화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또 하나의 시장, 자본이죠. 시장과 대중문화, 굉장히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죠. 돈 주고 사고, 돈 받고 파는 거죠. 그 과정을 통해서 생산되고 유통이 됩니다.
따라서 대중문화 미술을 생산하는 생산자들 방송사, 영화사, 음반회사 이것을 생산하는 생산자들의 중요한 목표는 무엇일가요. 돈 버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목표고 전략과 전술을 만들어내고 고사를 하죠. 대중문화가 통제됩니다.
지금 어떤 것이 트랜드다, 걸 그룹이 트랜드다라는 것은 그것이 상품장사가 가장 잘 되는 것이고 걸 그룹을 만들고 음반을 내야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지금 약간 조폭영화가 히트 치고 있다는 것은 조폭영화를 해야 돈을 번다는 겁니다.
유행이라는 것이란 시장 논리 속에서 만들어 지는 거죠. 미디어가 갈수록 대규모화 되고 독점화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닮은 것들이 시장에 들어서니까 더욱 힘들어 집니다. 진입장벽 같은 것이 더욱 강하게 생겨나는 거죠.
우리가 뭐 코미디에서 보지만 한국사회는 더욱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아닙니까. 이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소위 대중문화 시장입니다. 승자독식 구조, 우리 사회 정치, 경제 뭐 다 그렇지만 특히 대중문화시장이야 말고 승자독식구조 시장입니다.
지금 대중음악의 예를 들어보면 아이돌 스타의 주류 음악이 몇 개 안되잖아요. 걔네들이 시장을 차지하는 비중이 90%입니다. 그외 홍대 앞의 엄청나게 많은 밴드들과 다른 옛날부터 해왔던 사람들이 나머지 10%를 나눠 먹고 있는 거죠.
그런 상황에서 문제는 뭐냐, 문화적 다양성의 소멸입니다. 한국사회에서 대중문화라는 영역의 가장 큰 문제가 뭐냐고 한다면 문화적 다양성의 부재라고 얘기합니다. 즉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취향과 다양한 미관과 다양한 가치관을 골고루 반영할 수 있는 문화적 기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면서 소수자 문화라는 것이 주류 미디어 시장에서 철저하게 배제되는 상황, 그런 것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론적인 측면에서 살펴봐야 할 것은 제가 처음에 대중문화의 형성이 민주주의와 어떻게 관련 되었는가 말씀 드렸는데 대중문화를 작용하는 두 가지 힘, 국가와 돈에 대해 이야기 했고요. 대중문화는 국가와 돈이라는 지배력이 굉장히 강력하게 작용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죠.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대중문화를 수용하고 즐기고 선택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대중문화 속에 투영이 됩니다.
결국 대중문화라는 공간은 그것을 지배하고자 하는 권력의 힘과 자본의 힘, 그것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고 즐기고 좋아하려고 하는 수많은 대중들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이 대중문화의 공간속에 끊임없이 만나고 부딪히고 싸우고 타협하는 공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많이 사용되는 개념이 문화 정치라는 것입니다. 결국 문화를 둘러 싼 수많은 사람들, 시민들, 세력들의 갈등 등이 정치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거죠. 법률을 둘러싼 싸움이라든가 텔레비전이라는 문화 매체 속에서, 예를 들면 송해 할아버지가 진행하는 전국노래자랑이 있고 젊은 애들이 주로 좋아하는 아이돌들이 많이 나오는 인기가요 이런 프로그램이 있죠. 그런 프로그램을 보는 시청자들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각각의 다른 문화를 좋아하는 집단이에요. 동시에 두 프로그램을 다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있다면 이상한 사람 같은데 그렇다면 결국 텔레비전이라는 공간 속에서 두 가지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각각의 집단들이 누가 좋은 시간대를 차지하고 광고를 유치하고 하는 것을 두고 싸우고 있는 거죠.
이것처럼 대중문화란 끊임없이 일상 속에서 정치적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공간이라고 하는 것이죠. 영화를 통해서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들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굉장히 큰 요소들이죠. 그런 정체성은 대중문화라는 메커니즘 속에서 형성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통해서 표현되는 거에요.
대중문화가 끊임없는 수많은 집단들 대중들에 갈등의 장이 될 수밖에 없는 거죠. 그 다음에 또 대중문화를 통해서 어떤 문화를 표현하는가 재현의 문제가 있어요. 어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노동자는 노동자처럼 재현되고 사장님은 사장님처럼 재현해 어떤 독특한 방식들이 재현됩니다. 뜯어보면 찾을 수가 있어요.
파출부나 식모 대부분은 식모로 충청도 사투리를 씁니다. 조폭들과 노동자는 전라도 사투리를 씁니다. 이것도 굉장히 정치적인 성격이 있는 거거든요. 어떤 집단이 어떻게 실현되는가 하는 문제 따지는 것, 비판하는 것이 문화 정치적 과제가 되겠죠. 그래서 대중문화라는 공간은 무지하게 복잡한 갈등과 문제가 일어나는 공간입니다.
그 안에는 계급정치, 노동정치도 있고 노동자와 사장님이라는 재현의 문제, 또 세대 정치가 있죠. 90년대 서태지가 레게파마를 했다고 KBS에서 방송출연 못하게 했어요. 그래서 팬들이 난리를 쳤습니다. 얼마 후에는 서태지 음반을 거꾸로 돌리면 악마의 소리가 들린다는 그 얘기 기억납니까? 피가 모자라, 이런 거.
이런 게 사실은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서태지로 표현되는 문화의 가치와 감수성을 보는 기성세대 보수세대의 시각이 충돌하는 중요한 지점들인 거죠.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미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50년대 말에 트럭운전을 하던 한 젊은이가 자기 어머니 생일 곧 오는데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동네 녹음실에 가서 자기 노래를 녹음을 합니다. 녹음실 주인이 보니까 백인인데 흑인처럼 노래를 부른다 이거죠. 가수한번 안 해볼래, 라고 해서 가수가 됩니다. 바로 엘비스 프레스리로 미국 전역의 스타가 되기까지 딱 2주가 걸립니다. 엄청난 스타가 됐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출연을 시킵니다. 노래를 부르는데 리허설 보는 방송사 관계자 분들이 지시를 내리죠. 카메라맨한테 배꼽 위만 잡아라. 아래는 잡지 마라. 그 친구가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 엉덩이를 좌우로 흔드는 게 아니라 앞뒤로 흔드는 거죠. 그래가지고 텔레비전 화면에 상반신만 계속 나옵니다.
전국의 수많은 십대들이 이것을 봤는데 이거 분명 밑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는데 안보여 주니까 상상을 하게 되기 때문에 엄청난 항의가 쏟아집니다. 그래서 다시 찍어요. 아무튼 엘비스 프레스리가 부른 음악이 굉장히 흑인 음악을 풍기면서 백인의 감이 되는 가미된 그것이 록앤롤 이라는 거거든요.
그 이름도 우리말로 하자면 섹스를 말하는 속어입니다. 우리나라의 그런 속어들이 있잖아요. 차마 입에는 못 올리겠지만, 학문적인 의미에서 입에 올린다면 예를 들어 빠구리라든가 그런 단어거든요. 이게 갑자기 노래로 만들어 부른다니까 기성세대들 입장에서는 기절초풍할 짓이죠.
우리나라로 얘기하면 윤도현이가 나와서 “저 새로운 노래 빠구리 넘버로 하나 불러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거든요. 50대가 미국의 황금기거든요. 10대들이 자동차 몰고 드라이브 해가지고 댄스파티 열고 할 수 있었던 시절입니다. 10대들의 문화가 당시 기성세대들 눈에 어떻게 보였겠어요.
미국의 강력한 압력집단 중에 PTA라는 게 있어요. 어느 나라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들 중에는 경찰관 부인도 있고 합니다. 부인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이걸 가만 놔둘 수 없다고 하면 할 수 없이 남편이 동네 방송국에 가는 겁니다.
PD에게 락앤롤 틀지 말라고 압력을 넣습니다. 당시에도 방송국에 가면서 촌지를 줬는데 요즘 검사들이 받는 그런 게 아니라 정말 5달러, 2달러 이렇게 주는 겁니다. 1959년에는 당대 가장 큰 락앤롤 스타 3명이 사라집니다. 2명은 비행기 사고로 죽고, 1명은 자동차 사고로 전신마비가 되가지고 음악계를 떠납니다. 이게 FBI의 음모라는 속설이 지금까지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문화라는 것이 굉장히 정치적인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런 세대정치만이 아니라 성의 문제, 여성이라는 존재가 드라마에서 어떻게 비춰지는가, 동성애문제 이런 게 다 대중문화의 테마가 되는 거죠.
지역의 문제, 더군다나 한국처럼 지역갈등이 굉장히 정치적인 운명을 좌우할 사회에서 대중문화도 지역적인 주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건 국내 지역만이 아니라 미국과 한국, 후진국과 선진국, 로컬과 글로벌의 문제 이런 것들이 대중문화에서 끊임없이 등장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거죠. 결국 문화적 민주주의라는 것이 뭐냐, 문화의 가장 바람직한 문제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다양하게 존재하는 집단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취향과 욕망들이 다양하게 표출되고 각각 자신의 문화적 공간을 가질 수 있는 게 가장 중요한 원칙이 아닐까요.
지금 보면요 한국사회에서 대부분의 1, 20대 정도를 제외하면 자신을 대변할 만할 대변자가 없고 할 수 있는 건 노래방 가서 노래 부르는 것밖에 없는데 이것은 굉장히 왜곡된 거죠. 또 표현의 자유 문제, 다양한 문화적 욕구와 어떤 그런 것들이 생산되기 위해서 시장 논리가 작용하지 않는 공공의 영역이 작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공영방송이 그래서 중요한 거죠. 돈 안 되는 것도 보여주고 소수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도 들려주고 해야 문화의 공공성이 되는 것이 공영방송의 역할입니다.
대중문화와 민주주의라는 일반론적인 말씀을 드렸고 한국사회에서 대중문화와 민주의의의 역사라고 할까 그런 얘기를 잠깐 드리면 우리나라에서 우리가 대부분 느끼는 현대적인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군사정권 때라고 할 수 있죠.
본격적인 대중문화의 시대는 60년대부터다 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문화의 성장, 이루어 놓은 당대의 군사정권이 가지고 시각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도구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디어는 쉽게 말하면 정권과 정책과 이념에 맞는 내용을 만들어 내서 보여줘야 한다는 시각, 기대도구로 보는 시각이었습니다.
대중문화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죠. 그때부터 대중문화의 통제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60년대에는 방송윤리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져서 대중가요나 심사하게 되고 70년대에는 공연윤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어서 대중가요, 영화, 연극, 광고까지 사전 심사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연극을 하려고해도 미리 대본을 제출해야하는 거죠. 음반을 내려면 가사와 악보를 제출해야 합니다. 영화는 시나리오 제출하는 것이고요. 거기에 대고 쭉쭉 빨간팬으로 빨간팬 선생님처럼 다 코멘트를 해줍니다. “이 부분은 지나치게 허무하고, 반사회적 퇴폐하고...” 이런 식으로요. 그 검열의 수준이 얼마였냐면요. 여러분이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80년대 전두환 때, 예를 들어 연극대본의 남녀 주인공 이름이 두환이, 신자로, 두환이가 신자가 공원에서 데이트를 합니다. 국방색 벤츠를 깔고 앉아서 둘이 어깨를 안고 기러기가 북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있어요. 이 장면입니다.
주인공들 이름이 걸립니다. 두환이와 신자는 특정인의 이름을 생각나게 하니까 안 됩니다. 그 다음에 왜 국방색 벤츠냐 색깔 바꿔라 나옵니다. 그 다음에 왜 하필이면 기러기가 북쪽 하늘로 가느냐, 방향 바꿔야 합니다. 그 다음에 젊은 남녀가 대낮에 어깨를 안고 있어, 이게 웬일이냐, 선진조국 창조와 새마을 운동을 해야 하는데 대낮에 남녀가 그러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그 정도였어요. 농담이 아니고 다 실제로 하나하나 사례가 있는 겁니다.
그 당시에는 사전 심의를 통해서 걸러지고 영화를 찍어요. 허락을 받고 찍고, 검열을 받고, 다시 가위질을 하는 거죠. 싹둑 자릅니다. 음반은 음반이 나온 다음 또 내요. 녹음해서 또 내요. 또 검열을 받습니다. 방송국에서 또 심의를 해서 방송이 되느냐 결정합니다. 음반가계에서 팔 는 있어도 방송에는 안 나오는 거죠.
음반의 경우 레코드 검열을 따로 받습니다. 이정선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이정선씨가 음반 사진을 제출했는데 걸렸어요. 머리가 귀를 덮었다는 이유로 그래서 머리 깎고 다시 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걸렸어요. 노래 중에 가사가 문제가 돼가지고 결국 음반을 3번을 찍었어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대중문화에 대한 통제장치의 예입니다.
1965년도에 이만희 감독이 만든 <시즌의 여포로> 라는 영화가 있어요. 내용이 뭐냐면 한국군 여자 군인들이 포로가 됩니다. 인민군한테 끌려가는데 인민군 장교가 굉장히 멋진 남자인거예요. 여자들을 보호해 주면서 그 누가 강간하려는 것도 막아주니 여포로가 당신은 정말 멋진 남자라고 합니다. 결말은 여포로를 데리고 귀순하는 그런 내용인데요. 인민군 남자가 입은 옷이 너무 깨끗하고 군화가 너무 반짝반짝 빛납니다.
이것이 반공법 위반으로 걸립니다. 그래서 이만희 감독이 구속이 되요. 실제로요. 또 있습니다. 피카소의 그림으로 <한국에서의 학살>이란 게 있는데, 이것 때문에 피카소도 한국에서 빨갱이라는 오해를 받았어요. 어느 날 피카소 크레파스가 나와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다가 이 때문에 없어졌어요. 피카소라는 이름이 문제가 됐기 때문입니다.
(사진 설명)60년대 박정희가 최고의 스타들을 불러놓고 한마디 하는 거죠. 이런 것이 당대의 국가권력과 대중문화에 상징되어 보여줍니다. 그 당시의 권력자들의 인식이나 대중문화에 사회적 국가적 대접을 느낄 수 있는 것이죠.
70년대가 되면 우리나라 최초로 세대정치의 문제가 화두가 됩니다. 당대 20대 젊은 청년들이 부모들이 하지 말란 짓을 하는 거죠. 장발, 미니스커트 이런 모습들을 보여주게 됩니다. 이게 미니스커트 단속하는 사진입니다. 길거리에서 장발단속을 해서 깎였습니다. 귀를 덮으면 안 되는 것이 원칙이니까요. 걸리면 깎이고 했던 시절입니다.
이것은(사진)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음반이죠. 전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앨범으로 꼽히는 앨범인데, 라이센스로 나왔을 때, 윗부분이 시커멓게 칠해서 나왔습니다. 위에 많은 분들의 얼굴이 나옵니다. 요기 요 사람이 칼 마르크스라는 사람이죠. 이 사람 때문에 앨범 커버가 시커멓게 칠해졌습니다.
가끔 뉴스에 그런 게 나와요. 오늘 종로 경찰서에서 단속을 벌여 장발족 몇 명을 직결 처벌했다, 결국 이것이 75년에 가면 통기타 가요나 이런 것들도 된소리를 맞게 되죠. 75년도에 이미 검열을 통해서 나왔던 모든 가요들을 재심사라는 걸 해요. 금지를 때린 겁니다. 한때 검증가요라는 것들도 금지가 됐어요.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신중현의 “미인” 같은 노래가 창법저속 때문에 금지곡이 됩니다.
72년도에 유신체제가 선포되죠. 박정희체제로 가면서 대통령 직선제도 사라집니다. 75년부터는 엄청난 시점에 이런 조치가 취해졌고 같은 해에 소위 대마초 사건이라는 게 터집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은 병원인지 집인지 구별도 못해 이런 제목이 깔려있는데, 이거 다 거짓말입니다. 대마초 핀다고 사람이 다 저렇게 되는 거 아니거든요. 이때는 사실은 대마초를 피우면 불법이라는 법이 없었어요. 대마초를 피우는 게 적어도 불법은 아니었던 겁니다.
법이 없는 상태에서는 불법이 아닌 거죠. 법은 만들고 처벌하는 겁니다. 대마초에 대해서는 지금도 여러 가지 이론이 있고 그렇습니다. 이렇게 해서 75년 강제로 대마초 파동을 겪고 가요 재심사를 겪으면서 청년세대가 딱 중단이 됩니다.
그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게 송창식과 양희은이었어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말이 많습니다. 그렇게 70년대가 지나고 70년대 후반이 되면 대중문화 전체가 엄청나게 퇴행합니다. 청년문화, 포크, 통기타, 발랄하던 문화들이 만들어졌었는데 후반이 되면 완전히 퇴행해 버립니다.
76년을 보면 다시 트로트가 길을 걷습니다. 76년도가 되면 MBC에서 가수왕이라는 것을 뽑았는데 76년대 가수왕이 송대관입니다. 쨍하고 해뜰날이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립니다. 그 때 제가 고등학생이었는데 저는 정말 싫었어요.
나이가 들어서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렇게 까지 싫어했을까 너그러운 마음도 생기는데. 그 시절에는 그랬어요. 그 노래가 나오면 꺼버렸고 노래 자체도 싫고 내가 좋아하던 가수들이 못하는 상황에서 나오니까 그것도 싫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내가 그걸 흥얼거리고 있더라고요. 대중문화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람들이 의식의 상태가 아니라 무의식속에서 나에게 들어오는 거죠.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죠. 정치적 통제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거죠.
80년에는 또 다른 친구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서 수백 명이 광주에서 희생당한 그 위에서 그러던 정권 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유신체제보다 훨씬 폭력적인 시대였죠. 그나마 70년대 초에는 어쨌든 젊은 대학생들이 가수도 될 수 있었고 어떤 면에서는 나름의 융통성을 볼 수 있었지만 70년대 후반부터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대학문화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대학생들이 이제 두 가지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거죠. 하나는 그냥 열심히 제도권에 편입돼 살거나, 다른 하나는 운동권이 되거나입니다. 운동권이라는 개념이 이때부터 생겨나게 됩니다.
80년대가 되면 굉장히 조직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민중문화였고 민중가요라는 거죠. 왜냐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검열이 너무 확고하고 격렬했기 때문에 벽을 뚫을 합법화 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문화가 유통되고 생산되는 공간이 완전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제가 노래 운동을 하면서 처음으로 합법화 시도를 해보자, 혹시 모르지 않냐 뭐 이런 생각, 어쩌면 심의에 안 걸릴 수도 있다는 기대감으로 한번 해보자 해서 약 30곡을 골라서 공연윤리위원회 심의를 넣었어요.
9곡이 통과가 됐어요. 9곡이면 딱 LP 한 장을 낼 수 있는 분량이거든요. 당시에는 모든 음반에 건전가요가 한 곡씩 넣게 되어있어요. 건전가요까지 10곡이 딱 들어가는 거죠. 그런데 나오자마자 안기부에서 음반회사로 연락이 가요. 출시는 했어요. 몇 백장만 외에는 출시를 못했어요. 창고에 묵혀있었던 거죠.
그러다가 87년 이후, 89년도에 2집이 나왔고 그게 엄청나게 파장이 되면서 1집이 다시 팔렸습니다. 그래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란 이름이 만들어지게 된 거죠. 하여간 그런 속에서 대중문화 속에서 엄청난 투쟁이 된 겁니다. 이게 당시 불법으로 만들어진 테잎 입니다. 당시 굉장히 잘 팔렸습니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우리나라 음반 시장에는 통계라는 게 존재하지 않아요. 아무도 모릅니다. 조용필이가 몇 개 팔렸는지 조용필도 모릅니다. 음반사 사장은 알지만 알려주지 않아요. 모든 음반회사는 이중장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분명히 내가 생각하기에는 무지하게 팔렸는데 가서 돈 달라고 하면 5만장 팔렸다고 그것만 주는 거에요. 그런 시대였어요.
그 다음에 90년대로 넘어오죠. 90년대로 넘어오면 구도가 바뀝니다. 민중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이 사라지는 거죠. 검열이 많이 완화되고 없어지고 사전심의가 96년도에 없어집니다. 예전에 민중문화였던 것들이 대중문화가 되는 거죠. 그러면서 대중문화에 대한 문화정치에 컨셉이 또 달라집니다.
이 90년대가 언제 시작되는냐, 문화적으로 보면 92년도에 시작된다고 봅니다. 김영삼이 당선이 되고 무엇보다도 92년도에 서태지가 나왔습니다. 이건 완전히 한국 대중문화의 판도가 확 바뀌어버립니다. 서태지가 보여줬던 새로운 신세대의 문화가 당대 젊은 세대를 사로잡습니다. 그러면서 대학생들이 점점 사라져가요. 대학생들의 목소리가 사라집니다.
70년대, 80년대 가장 중요한 저항세력이 대학생들이였고 대학생들의 문화가 기성 대중문화와 다른 대안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일이 없어지는 거죠. 대학생들은 어떻게 되느냐. 중학생, 고등학생과 똑같아집니다.
90년대 이후로 가장 좋아하는 이가 누구냐고 대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하면 답이 고등학생들과 똑같습니다. 대학생다운 문화적 정체성이 사라집니다. 어쨌든 그런 가운데 신자유주의라는 시장 논리가 세상을 덮게 되고, 국가 권력의 힘이 약화되니까 검열의 벽은 점점 낮아지고, 표현의 자유는 보장 되지만, 그 대신 시장논리가 엄청나게 득세를 하죠. 말하지면 또 다른 통제가 벌어지는 거죠.
대중문화에 대한 시장문화의 통제로 바뀌는 거죠. 오로지 돈 되는 것만 하는 거죠. 돈 안 되는 건 철저하게 진입이 차단되는 겁니다.
이런 것들 속에서 대중문화의 논쟁들이 노정되기 시작합니다. 그 여전히 시장논리는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기대가 되어있고 90년 이후 엄청난 채널이 생겨나게 되잖아요. 채널이 늘어날수록 문화적 다양성은 축소가 됩니다. 또 재밌는 것은 과거에 대중문화를 기대하는 기대문화는 시장을 지배했을 뿐 아니라 도덕적 가치도 지배했어요.
그런데 90년대 이후에는 시장을 지배하는 것이 신세대 문화입니다. 그러나 또 어떤 한국사회의 권력을 지배하는 것은 기성세대예요.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보면 신세대 문화를 보면 굉장히 걱정스럽고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끊임없이 보여 집니다.
이렇게 대중문화는 아이돌이 장악하고 승자만 남는 질서가 계속 되는 겁니다. 이명박 시대가 되면서 또 한번의 변화가 다시옵니다. 여전히 시장논리가 득세하면서 아주 천박한 신자유주의가 득세합니다. 한국 사회는 MB 시대가 오면서 신자유적논리와 국가주의적 논리가 아주 기묘하게 기형적으로 결합하는 양상을 보여주죠.
그러면서 PD수첩 문제라든가 문화 곳곳에서 코드 인사 문제 이런 것들이 벌어집니다. 그거랑 조금 다르지만 국가주의적인 흐름을 일컬어 주는 박재범사태 같은 것, 한국사회의 기묘한 이중구조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런 것들을 대중문화 속에서 볼 수가 있죠. 이런 가운데에 문화적 민주주의 역시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얼만 전에 PD 수첩 검사와 스폰서 보듯이 그런 프로그램에 우리 문화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지 않나요?
그것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고 있고. 정말 세월이 자꾸 거꾸로 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노찾사가 사실은 92년도까지 절정을 이루다가 잠깐 내리막길을 걷다가 98년도에 활동정지를 합니다. 2005년 정도부터 조금씩 우리끼리 고민도 하고 있는데, 최근에 와서 갑자기 노찾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시대가 다시 20년 전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좋아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연애인들이 다큐멘터리 나레이션한 것 까지 문제가 되더라고요. 참 황당하지 않습니까? 뭐 윤도현이나 김재동이나 이런 친구들 우연찮게 모두 제 제자들입니다. 그 상황을 너무나 잘 아는데, 참 황당한 일이죠.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 문화적 민주주의라는 것은 어떤 것이고 어떤 조건을 충족 시켜야 하는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문화적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건 표현의 자유입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에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되는 거죠. 연애인이든, 누구든 마찬가지입니다. 그 다음에 그 사회에 수많은 소수자들이 문화적 발언권을 가져야 합니다. 동성애자든 여성이든 이주노동자든 그 이주노동자가 10만이 넘죠. 그 이주노동자들끼리 구성한 밴드가 있어요. 그 밴드의 리더가 강제추방 당했습니다. 걔네들 공연도 보고 만나기도 했는데, 한국 사회의 변화와 민주주의적인 것을 위해서 그 친구들이 한국에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단지 이주노동자로서의 이치가 아닌 그들의 활동이나 발언이 한국 사회에 대해 필요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런 것들이 있어야하고 존재할 수 있겠끔 문화적 공공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거죠. 문화적 공공영역이 존재해야 하는 겁니다.
MBC의 문화적 특징은 특히 문화적으로 모든 공공문화를 파괴하고 있다는 거예요. 공영방송까지도 쪼개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시장주의적인 논리가 공공적인 통제를 통해서 보호받는 영역이 필요한 거예요. 과거 정권이 잘 못한 것도 많고 결국 신자유정권이었고 하지만 적어도 문화적으로 보면 그런 노력은 했어요. 인디밴드 하는 애들 음반제작비를 지원해 준다거나 그런 거 다 썼어요.
현정권 들어서 제가 한국대중음악상이라는 시상식을 만들었는데, 지난 정권에서 도와줘서 계속 유지가 됐었어요. 그런데 작년에 짤렸습니다. 그런 게 정치적 형량뿐 아니라 정치적인 말도 안 되는 문화적인 안목이나 공공적인 가치나 안목이 전혀 없어요. 이런 것들이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굉장히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 조치는 대중입니다. 대중 자신이에요. 국가가 하겠습니까? 자본이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합니다. 대중의 자발적 참여가 주체적 선택과 적극적 수용이라는 것이 그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대중문화의 수용자인 한 사람으로서 주미디어에 걸러지지 않고 존재하는 어떤 것을 찾아내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하고 그걸 달라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주체적인 능력과 실천적 인식과 같은 대중이 필요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전충남민언련이나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일단 제 말씀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