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을 사람의 만남이 아름다운 도시로,
열린시대 새 지방자치를 만들어갑니다.
제도 교육 12년은 악몽이었고, 대학시절은 꿈의 좌절이었다. 학교의 가치관은 반공과 성공이었고, 착하게 사는 건 죄악이었다. 가장 슬펐던 건 스승다운 스승이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서로 다르건만 학교라는 공장에게 같은 모습으로 ‘생산’되었다. 벽은 견고하고 높았다. 핑크 플로이드의 「Another Brick In The Wall - Part II」는 정직한 현실이었고, 뮤직비디오의 어린 학생은 내 모습으로 오버랩 됐다.
현실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소박한 꿈마저도 상상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 때문에 괴롭고 혼란스러웠다. 상대의 말 한마디에 그를 증오하고, 돈 몇 푼에 치졸하게 굴던 나와 세상의 불합리를 외쳐대고, 양심을 지키려는 내가 구분되지 않았다. 어느 게 나인지 헷갈렸다.
인생의 고비와 삶의 충돌 속에 누구 하나 붙잡고 얘기할 이 없었고, 내 부모는 세상에 늙어갔다. 내 작은 꿈 하나만큼은 이루고 싶었지만 행동은 헛된 궤도를 그렸다. 그 시기에 김수영이 있었다.
우산으로 마누라를 때리고, 여자를 사고 나서야 소녀들이 더 순수하게 보인다는, 돈 1원 때문에 치졸하게 굴던 김수영 때문에 이상과 현실은 다른 게 아닌 한 몸이란 걸 알았다.
김수영처럼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속에서 자신을 고백하고 실천했던 이도 드물다. 그는 생이 치욕이라고 말했지만 현실을 타파하려고 ‘온몸’으로 실천했다. 그의 화두는 반성이었고 시를 통해 자신과 세상을 조롱했다.
그의 행동은 내가 부끄럽던 시기, 생은 치욕스러운 거라는 명분을 제시했다. 완벽하게만 보였던 그의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 무엇보다 그의 용기가 부러웠다.
김수영은 시 뿐만 아니라 산문에서도 시인 이상의 계보를 잇는 일급산문가로 알려져 있다. 시가 김수영에게 반성과 불합리를 외치는 공간이었다면, 산문은 그의 이론과 시론을 펼치는 논리의 장이었다. 그의 산문에는 유모와 반전, 생의 지혜가 담겨 있다.
지금까지도 논쟁의 불모지인 이 땅에서 김수영은 1960년대 이미, 이어령과 세 번의 논쟁을 통해 순수와 참여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고, 논쟁을 논쟁으로 끝낸 게 아니라 그의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하려 노력했다.
김수영이 여전히 한국문학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귀감으로 남는 이유는 언행일치를 알몸으로 보여준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한때 정의를 외쳤던 이들이 자신의 시대를 배반하며 수치를 느끼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 김수영은 더욱 보배로운 존재로 다가온다.
자신의 치부와 잘못을 고백하고, 고백을 몸으로 실천하려 했던 김수영은 여전히 나에게 귀감이고 영원한 스승이다. 비록 내 자신은 여전히 비겁하고 소심하지만 김수영의 글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는다.
글 | 염대형 연구원(대전시민사회연구소) bigbrother74@hanmail.net
* 참여자치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0-03-17 10:22)